6. 화엄사 석등과 고달사 부도, 그리고 선종의 선택...
나는 가끔 화엄사 석등과 이 고달사 부도를 비교해서 생각해 본다.
지붕돌의 넉넉함과 호방함이 비슷하고, 지붕돌 위로 치켜세워진 귀꽃의 기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석등과 부도가 만들어진 이후, 이들의 기백과 기상을 따를만한 모방과 재현을 이어나가지는 못했지만
둘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경지를 이룬 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화엄사 석등...>
기단부와 몸돌, 옥개석으로 구성되는 부도와 석등은 비슷한 체감과 비례와 미감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고달사 부도와 화엄사 석등은 비슷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전혀 다른 미감으로 느껴진다.
고달사 국보 부도가 크고 화려하지만, 화엄사 석등이 가지는 웅혼한 힘과 장대함을 따르지 못한다.
또한 부도도 석등도 이 시대를 벗어나면 더 이상 장엄한 규모와 정연한 신라식 미감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도는 이후에도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지만, 석등은 화엄사에서 역사적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선종의 선택이었을까? 정치적 판단이었을까? 어쩌면 이점은 선종과 미륵사상의 차별 때문은 아닐까?
혹시 그 차이가 바로 시대정신의 선택과 영감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내가 보기에 역사와 시대는 화엄사 석등의 장중함보다는 고달사 부도의 유연한 힘을 선택한다.
또한 석등의 상징적 광명보다는 실존하는 인물의 구체적 진실과 부도의 내면적 수양을 추구한다.
견훤이 만들었을 거라 생각되는 화엄사 석등의 장대함과 호탕한 기세는 말 그대로 武力으로 끝났지만,
고달사 부도에 새겨지고 모색된 유려하고 온화한 부도식의 미감은 말 그대로 고려의 文化로 이어진다.
고달사 부도는 귀족적이라 알려진 고려의 문화처럼 넉넉하지만 섬세하고, 화려하면서 조잡하지 않은,
해체된 분산과 내면의 수양을 자기 정체성으로 설정하는 시대정신의 대변이자 총화였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오지랖을 넓히자면, 사람들은 선종이란 새로운 사상이 신라의 해체와 몰락을 가속시키고,
고려의 개국과 창업을 재촉했다는 사실에만 집착하여 선종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종의 주요한 지역적 기반은 후백제 지역이며, 구산선문의 대부분은 견훤의 세력권에 있었다.
800년대 초반, 중앙집권 형태를 유지한 경주(!)와 육두품(!)의 배타성에 환멸을 느꼈던 지식인들은
전라도 일대에 기반을 둔 장보고 세력에 의탁하고 있었고, 이곳은 신문물이 가장 왕성하게 교류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왜 이 지역에 있던 구산선문을 비롯한 대부분 선종세력들은 견훤을 배제하고 왕건을 지지했을까?
이점은 견훤이 구산선문의 지역적 기반을 정치적 사상적으로 포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견훤의 몰락은 군사력의 열세도 미륵사상의 중시 때문도 아닌, 선종의 진정한 요구를 간과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왕건으로 대체되는 궁예세력의 한계일 수도 있다)
왕건의 승리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포용하고 수렴할 수 있는 지도력과 혜안을 갖췄음을 의미한다.
결국 신라의 멸망과 후백제의 몰락, 고려의 창업은 선종세력들의 정치적 선택으로 결정 됐는지도 모른다.
850년경 신라에 의해 강제로 해체된 청해진 세력은 구산선문의 도움을 받아 해상세력으로 재조직되며,
이들의 정치적 물질적 도움과, 심지어 신변의 위협에서 벗어나곤 했던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후
전국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선승들의 부도탑과 부도비를 자신의 명으로 만들어간다.
이 부도와 부도비들에 왕건이 이해하고 모색하고 열고자했던 사상적 깊이와 문화적 양식이 담겨져 있다.
경주의 작은 육촌마을에서 시작하여(육두품) 강력한 중앙집권(경주 화랑)을 이뤄낸 정복국가 신라를 이어
군마와 철기병이 휩쓸었을 후삼국시대의 한반도를 통합하는 데에는 그런 세심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미륵의 화신을 통한 대리만족과 강력한 왕권의 집중적 통치를 강조했던 (궁예나) 견훤의 자기과시보다,
당시의 민초들이 요구했던 시대정신은 불성의 체화와 자기성찰로 이루어낸 안정이 더 요구됐을 거 같다.
고려는 그렇게 선종으로 시작하여 화려한 문화를 꽃 피우지만, 지방분권의 유약함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비약임은 분명하지만, 화엄사의 석등과 고달사 국보부도를 비교하면서 나는 그런 정치적 흐름을 읽는다.
결론적으로 선종의 득세와 함께 시대정신을 놓쳤던 신라와 당나라는 900년대 초에 멸망하고,
궁예와 견훤은 이들을 조직하지 못했지만, 왕건은 이 힘을 세력화했고 중국은 분열하며 권력은 분산된다.
선종은 한 시대의 격동적인 변화를 추동하는 중대한 힘이었고, 그들은 권력을 선택할 수 있었다.
호방함과 겸손함을 동시에 느끼기란, 장중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갖추는 것만큼 결코 쉽지 않다.
고달사의 국보 부도가 내게 유의미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상반된 미감을 아름답게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화엄사 석등과 고달사 부도는 호방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갖춘 명품이며 수작이다.
그러나 화엄사 석등은 장중함이 강조되어 있고, 고달사 부도에서는 겸손함을 더 많이 느낀다.
이 두 유물이 보여준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은 그렇게 전혀 다른 맛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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