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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행...

고달사 8> 고달사 석등 - 고달이라는 석공의 자유로운 영혼?

 

  

 

 

 

8.

 

이제 마지막으로 고달사에는 없지만, 고달사에서 만들어진 것들에 대해 살펴본다.

고달사는 <고달(高達)>이라는 석공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절집이다.

석가탑을 만든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처럼, 고달사에는 고달과 달여라는 서글픈 전설이 서려있다.

가정의 궁핍을 외면(?)하고 오로지 불심 하나로, 돌을 쪼으고 다듬으며 모든 공력을 쏟아 부은 고달...

그 고달을 찾아 함흥에서 여주까지 내려왔으나 남편 얼굴도 못본체 귀향하다 죽은 달여와 그의 딸 유달...

고달은 몇 년동안 고달사에서 여러가지 석조물을 만들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부인과 어린 딸이

자신을 찾으러 왔다가 객지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서 출가하였고, 그의 뜻을 기려 고달사라 불렸다 한다.

(석공과 그의 아내와 그의 어린 딸아이 모두 고달사의 <達(달)>이라는 운이 붙어있다)

 

<잠시 박물관엘 갔다... 고달사석등 사진 찍으러...^^> 

 

그만한 아픔과 그만한 절박함과 그만큼의 간절함 때문에 고달사엔 그런 유물들이 남아있을까?

어쩌면 나는 범인들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애틋한 전설을 되내이며,

단란했던 가정을 깨뜨리며, 죽음으로 생이별을 하면서까지 이루고자했던 창작과 완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쏟아 부으며 혼신의 진력을 다했던 석공의 예술혼이란 무엇인지,

도대체 그런 처절한 고통을 감수해냈던 원동력이 불심이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

그리고 전설과 설화의 형태로 전승되는 그들의 삶과 시대정신은 어떤 사연과 진실과 허구를 만들며

우리들에게 역사란 이름으로, 문화란 감흥으로, 예술이란 향기로 어떻게 채색되는지 느껴보고자 했다.

 

<고달사 석등 / 보물282호 / 높이 3m...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나와 있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다... 복도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을 거 같은데... 색시촬영...^^ - 근데 막상 탑들과 함께 놓여있는 모습은 어딘지 어색하고 초리해 보였다... 자기 자리가 아닌 것 처럼... 게다가 볼륨 있는 탑들과 함께 있다보니 왜소해보이기도 하고... 글쎄~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우리들이 국보와 보물, 혹은 문화재란 이름으로 칭송되는 것들에 서린 인간들의 삶을 만져보지 못한다면,

차가운 돌멩이, 쉬이 깨뜨려지지 않는 바위에 혼을 새기고, 피로 물들이며, 땀으로 다듬었을 석공과 건축가들,

그들의 마음과 삶과 소망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유적과 유물들은 권력의 사치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권력의 착취일 수도 있고, 기능과 기술의 거래나, 과시욕을 채울 쾌락적 전유물일 수도 있다.

또한 현재의 틀로 정형화 시켜, 고착 되고, 필요에 의해 화석화 시킨 안내와 강요는 편협할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느낌으로나마 권력과 금력과 모든 교조적 틀에서 접근과 분석과 의미를 해체시키고 싶은 것이다.

 

돌멩이와 나무에서 사람의 향기를 찾아낸다면, 무생물의 바위에 묶인 혼은 자유를 얻을 것이고,

말하지 않은 조각과 건축과 그림에서 역사와 사상과 문화를 읽어낸다면, 시간과 공간은 충만 될 것이다.

우리를 설명하고, 역사를 이해하며, 내게 내재된 DNA를 찾는다는 거창한 이유를 벗어버리면,

또한 진지하거나 가벼운 문화유산 답사여행에서 사람의 삶과 땀 내음과 슬픔과 웃음과 꿈을 우리들이 느낀다면,

숭고하리만치 집요한 예술혼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미를 느끼며, 새로운 영감을 얻을 문을 열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크거나 작은 희생의 크기와, 완성의 깊이가 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넓거나 좁은 집착의 범위가, 완숙한 자유로움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과 오랜 숙련으로 만들어진 기능과 기술의 기간만으로

우리들을 충만함으로 이끌 수 있는 아름다움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기계적인 몸과 즐길 수 있는 마음만으로 지혜로운 선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감탄과 경의와 득의의 웃음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혹은 적당히 필요하다.

필요불가결한 희생과 수용가능한 집착, 다양한 경험과 기계적인 움직임, 그리고 혼연일체의 마음...

또한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직간접적인 관계와 능동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새로운 시대정신,

그리고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장기적인 안목과 합리적인 판단, 그리고 아름다운 선택을 필요로 한다.

내가 유적과 유물의 선후, 경중, 고저, 친밀도와 호불호를 나누는 기준은 그런 것을 열어주는 <느낌>이다.

사람을 느낄 수 있는,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역사-사상-경제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자극들...

 

비단 고달사만이 아니라, 우리를 문화유적답사(혹은 어떤 것이라도)로 이끌만한 매력을 가진 모든 곳-것에는

우리들이 알든 모르든, 그만한 사연과 깊이와 수준을 충분히 담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달사를 정리하면서 이 말을 되내어 보는 것은 이곳이 그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를 다시 추스르는 처음을 기억해보기 위해서, 또 다른 자극을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개개인이 만들고자 하는 자아, 혹은 꿈을 채우고, 지금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우리들은 자극과 소통을 원한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넓고 높고 깊은 평상심을 찾고, 열린 자유와 긴 안목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달사에서도 문화유적 답사에서 사진에서도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내가 찾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97년쯤 사진일 거 같은데?.. 고달사 석등이 옥개석을 찾지 못했을 때, 용산으로 중앙박물관이 옮겨지기 전에는 경복궁 한적한 뜰 뒤쪽에 놓여있었다... 바로 이 모습이 60년대쯤에는 종로의 한 예식장 입구에 금붕어를 키우던 어항이었다고 한다...>  

 

 

 

간만에 쓰려고 노력(??)(!!!)하는 답사기라 역시 사족도 어설프고 서두도 길고, 잔소리도 많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고달사에는 우리가 고달사에서 볼 수 없는 유물이 하나 더 있다.

내 생각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이지만, 분명한 한 개는 지금 중앙박물관에 있는 석등이다.

지금은 햇빛을 받고 있지만, 몇 년동안 중앙박물관 복도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사랑받았던 이 석등은

사실 고달이 만들었는지, 신라말에 만들어졌는지, 원종대사 부도와 함께 만들어졌는지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현재 고달사에 남아있는 석물들은 870년 경부터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조성됐기 때문이다.

 

 

 

 

 

나는 고달사에 석조대좌-국보부도-석등, 혜진탑-탑비-그리고 또 다른 석등이 세트로 존재했을 거라 보는데

이 석등들은 원감국사 부도 때 만들어졌을지, 원종대사 부도와 같이 만들어졌는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먼저 보물 282호 석등은 너무나 특이하고 독창적이면서 최초이자 마지막 형식을 갖추고 있다.

앉아 있는 쌍사자 좌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간주석, 사각의 화사석, 넓지만 낮은 높이의 옥개석...

그 누구도 만든 적이 없고, 또 그래서 아무도 흉내 내지 않은, 그렇지만 그럴싸한 석등이 만들어졌다.

고달이란 사람이 만들었을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만들었을까?

   

 

<앉아 있는 사자의 갈기를 보면 참 부드럽고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좌우가 약간씩 다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 다르긴 다르지? ^^>

 

 

앉아 있는 사자에 새겨진 갈기의 부드럽고 유연한 선을 바라보면 정말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보는 것 같고,

장구형태를 역으로 변형시켜 탁자두개를 뒤집어 포개놓은 듯한 간주석을 보면 모방을 혐오하는 결핍증 같고,

화사석을 받치는 앙련을 뭉개버리고 지붕돌 위로 과감하게 올려놓은 걸 보면 괴팍한 심술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과 넘치는 과시욕은 아직은 미숙한 욕심쟁이로도 보이고,

도대체 원칙도 없고, 정석도 없고, 무엇이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종잡을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본다.

 

 

 

 

 

 

그런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이 석등은 내게는 만족할 만한 호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팔각 간주석 형태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법주사 사천왕 석등의 당당하면서도 준수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문양과 최적의 비례를 갖춘 용암사, 실상사 석등처럼 우아하고 세련된 멋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엄사 석등처럼 장중한 맛이나, 청량사 석등처럼 우직한 느낌, 경주박물관 석등처럼 단아한 느낌도 없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처럼 세련된 조각을 느끼지도 못하고, 보림사 석등처럼 정교한 조각을 갖지도 않았다.

단아하거나, 우아하거나, 세련됐거나, 화려하거나, 장중하거나, 준수한 느낌, 어디에도 이 석등은 가깝지 않다.

 

 

 

<사자들 엉덩이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궁금했는데...^^ 이 사진 찍을 위치면 경보가 울린다... 경비아저씨도 쫓아오고...^^> 

 

 

 

구성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중층적으로 이루어져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장 아래쪽 기단은 안상을 새겼으니, 보현보살이 타고 다니던 코끼리의 이로움과 정의로운 실천을 상징하고,

안상 위에 앉아있는 쌍사자를 조각했으니, 이는 문수보살이 타고 있던 사자의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 위에 있어야할 연화좌, 즉 연꽃 자리를 만들되 정교하게 꾸미지 않았으니 여기서부터 구성이 복잡해진다.

 

<2001년 고달사터 발굴 작업중 비교적 온전한 모습의 옥개석이 찾아지고, 2002년에는 이렇게 온전한 모습을 찾았다...>  

 

 

 

더군다나 고려시대 탑에서나 보이는 판석처럼 툭 튀어나온 중간굄대는 장식적이고 공예적 요소의 강조이고,

일반화된 팔각형의 화사석이, 사각형을 기준으로 모만 땄으니 이전의 형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간결한 처리고,

넓고 낮은 옥개석도 독특한데다, 그 위쪽에 자리한 복련의 형상이 꼼꼼하고 정성스러운 걸 보면

오히려 분실된 상륜부의 다양하거나 독특한 형태를 잃어버려 전반적인 느낌을 잡을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나주서문 석등이나 현화사 석등처럼 온전한 상륜부없이 이 석등의 전체적 미감을 말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과 이 석등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이, 다양한 요소의 타협처럼 보여 일체감을 저해하는 것 같다.

 

<오히려 기단부 상대석에서 화사석, 그리고 옥개석만을 보면 고달사 석등은 완전히 달라진 느낌으로 다가온다... 안정감있는 비례에 조화로운 균형까지... 차분하면서도 준수한 맛을 가진 귀공자 같은 느낌... 귀꽃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

 

<이제부턴 고복형(장구 옆으로 뉘어 놓은 모습, 혹은 탁자 두개를 뒤집어 포개놓은 모습) 석등들을 비교해보면서 고달사에 있던 석등부재와 비교해 본다...> 

 

 

 

<개선사 석등 / 868년경 / 보물111호 / 광주 무등산 개선사지... 고복형 석등의 최초 형태이다... 아마도 부도나 석등의 복련에 귀꽃이 일어난 최초의 형태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서 고복형 석등의 여러형태 사진을 소개하는 이유는 고달사의 보물 석등과 비교해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고달사에 있었던 또 다른 석등부재의 제작연대를 추정해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선림원 석등 / 886년 / 보물445호 / 양양 선림원지... 크기가 작아진 만큼 부재도 간결해지고, 화사석을 떠 받치는 앙련과 기단부 복련 사이의 간주석형태가 훨씬 장식적이로 변해감을 추정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금은 고달사에서 찾을 수 없는, 그러나 10여년 전에 내눈으로 보았던 석등부재가

어쩌면 원감국사 부도가 만들어진 시대의 고복형 석등부재이고, 보물석등이 후대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보았던 그 석등부재는 근대의 모방품일지도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선사 - 선림원 - 용암사 - 실상사 - 청량사 - 화엄사의 계보를 잇는 고복형 석등 부재로 딱 맞는다.

특히 만들어진 형태를 실상사와 청량사 사이에 끼워 넣어 비교하면 변천양식이 제대로 연결 된다.

 

<실상사 석등 / 915년경 / 보물35호 / 지리산 실상사...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매우 아름다운 석등이다... 간주석의 형태를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중간에 띠가 조각으로 대체되고, 꽃문양의 고리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고달사 석등 부재... 최근 고달사에서 찾아 볼 수 없었지만, 10여년전인 99년~2000년 사이에 내 카메라로 찍었으니, 확실히 고달사에 남아있던 석등의 부재로 보인다(인화된 사진을 작게 스캔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분명 고달사터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한다)... 실상사의 간주석과 비교해보면 장식적인 요소들이 거의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굴곡이 부드럽게 처리되고, 유려한 곡선으로 대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석등부재 때문에 고달사에는 두개의 석등이 있었을거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청량사 석등 / 921년경 / 보물253호 / 합천 가양산 청량사... 간주석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지만, 훨씬 투박해지고 간결해졌음을 느낄 수 있다... 장식적 요소가 적어지는 것이 강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매우 우직하고 당당하다...> 

 

 

개선사, 선림원의 석등 간주석에 보이는 고복형의 초기형태가 용암사에서 공예적으로 완숙미를 갖추고,

실상사에서 화려한 장식적 요소가 세련화 되고, 청량사에서 간결하게 정리되는 과정에 이 부재가 있다면,

조각은 화려함을 잃지 않았지만, 띠로 연결된 꽃문양이 도드라지면서 형태는 간결하게 정리되는게 보이는데

이런 조형적 변형과정을 추적한다면, 현재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 고달사 보물석등은 훨씬 후대의 것이 된다.

실상사에서 보이던 복련의 장식적 요소는 살리면서 두터운 옥개석은 청량사 석등처럼 조금씩 얇아지고

청량사나 화엄사 석등에서 보이는 간주석 중간부분의 강조는 이 고달사 석등에서 극대화 됨을 볼 수 있다.

후후~~~ 조금 어거지지? 비약도 심할 수 있고, 게다가 이 부재는 어느 시대것인지도 불분명하니 말이다.

 

 

<용암사 석등 간주석 / 901년경 / 보물 267호 /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우리나라 석등을 대표할만한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그리고 준수한 맛을 함께 갖춘 걸작중 하나다...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아쉽지만... 개선사 석등 간주석을 조형적이고 세련되게 처리했지만, 화려한 조각 장식을 갖추지 않은 모습이다...> 

<화엄사 석등 간주석 / 928년경 / 국보12호 / 지리산 화엄사... 개선사에서 시작된 고복형 석등이 최후로 완성된 형태다... 모든 장식적 요소들은 사라지고, 가장 간결하게 최소의 상징만을 담았다... 여백이 넘치지만 허전하지 않고, 부드러운 곡선에 장중한 맛을 최대한으로 살린 우람하면서도 장중한 맛을 갖추었다...>

 

 

<고달사 석등 간주석 / 원종대사 부도탑과 함께 만들어졌다면 977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 어거지일까?^^>

 

 

하지만 고달사에서 만들어졌지만, 지금의 고달사에서 볼 수 없는 석등과 간주석만 남은 석등부재는

그렇게 역사적 자리를 차지하며 서로 연결될 수 있다.

해방후까지 고달사에 있다가, 종로의 어느 예식장 입구에서 금붕어나 키우던 어항으로 전락하고,

다시 국유자산으로 회수되어 중앙박물관 뒤뜰에 처량히 놓여 있다가 2001년 고달사터에서 옥개석을 찾아,

용산으로 옮겨진 중앙박물관 복도 한가운데서 많은 이들의 시선을 잡았던 고달사 석등처럼,

또다시 간주석만 남아있는 이 석등부재를 보면서 부질없는 역사의 상상을 추적해 봤다.

 

<중앙박물관 복도에 있을 때 모습... 흔들린 상태여서 선명하지 않지만, 옥개석 상부의 복련을 볼 수 있어서 골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