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지붕돌 하부에 새겨진 비천상들...
사실 이 부도를 오래 기억하고 있는 나는, 지금까지 내 마음에 드는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크기를 사실적으로 담지 못했고, 내 정성이 적은만큼 따사로운 빛을 얻지 못했기도 했지만,
(주변이 조금은 답답하게 막혀있기도 했지만, 내가 갔던 시간은 늘 느지막한 오후였다는 점이 크다)
부도탑을 채운 소소한 정성을 내가 원하는 만큼 한번도 담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달사 부도에서 나의 시선을 오래 붙잡은 것들은 밖으로 보이는 크기와 볼륨뿐만이 아니라
지붕돌 아래에 새겨진 부드러운 선을 가진 유려한 곡선의 비천상과 작은 바람무늬들이다.
어쩌면 그런 소소한 조각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부도에 큰 애착을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고달사 부도에는 그렇게 많은 조각과 수준 높은 미감의 화려한 문양들이 있지 않다.
어쩌면 그런 조각과 문양들은 연곡사 동부도나 북부도를 비롯 봉암사, 보림사 부도에 훨씬 많다.
화려하고 정성스런 문양 외에도 작고 귀여운 문양들은 보원사 법인국사 부도나 회암사지 부도에도 있고,
게다가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를 꽉 채운 문양과, 처마끝까지 놓치지 않은 정성은 정말 소름끼칠만 한다.
그러나 고달사 부도처럼 호방한 기풍에 장중한 맛을 갖추면서 화려한 맛을 살리기는 쉽지 않다.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 부분... 수막새 하나 하나를 채워나간 정성과 공력을 생각한다면...>
5-2. 작은 무늬에 새겨진 특별함...
지붕돌 아래쪽,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간에 새겨진 비천상과 바람무늬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숨겨진 조각과 그림은 석공의 자기만족일까? 아니면 기획자의 숨은 의도일까?
물론 부도탑은 입적한 선승에 대한 찬양과 극락왕생을 위한 여러 가지 상징들을 포괄할 수밖에 없다.
비천상은 하늘의 노래이고, 구름무늬는 하늘을 향한 비상이고, 이무기는 용의 전신이며 이승의 형태다.
사천왕은 사방을 수호하는 불국토의 영역을 상징하고, 잡상으로부터 존신의 권위를 지켜주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이 모아지면 사상이 되고, 상징이 모아지면 문화가 되고, 사상과 문화가 만나면 예술이 된다.
보이지 않는 곳을 치장하는 것은 정성이고, 정성이 아름다운 것은 깊은 성찰과 내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 조각을 쪼으고 새기고 그려간 석공과 기획자는 그만한 경지에서 후대의 우리들을 기다렸을까?
보지 않을 수도 있는 곳, 무심코 지나칠 것들을 놓치지 않은 것에는 얼마만한 정성과 배려가 필요할까?
그리고 그 정성과 배려는 기리고자 하는 이와, 기려야한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 작은 문양, 조심스런 조각 하나 하나로?
그 작은 조각과 그림들 하나 하나는 넘치는 욕심의 허장성세일 수도 있고,
빈공간을 용납하지 않는 정성, 또는 상징과 의미로 하나하나 새겨간 섬세한 배려일 수도 있다.
본래 장식과 사치, 정성과 욕심, 권위와 충성은 결핍과 충만을 드러내는 양날의 칼날이기도 하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물들의 화려함은 기획자와 소유자들의 권력과 부의 상징임도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그 유물들은 당연히 장식적이며, 권위적이고, 귀족적인 치장임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리들이 그 유물들을 찾아보고 열광하고 시대를 탐색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당대의 시대가 만들 수 있는 최대치의 미감과 열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을 인해 당시 민초들은 당대의 사상을 접하고, 문화의 교류를 읽을 수 있었으며,
그 시대가 극복해야할 한계와 새롭게 열어야할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구에 회자되고, 교본이 되고, 잣대가 되는 유물들이 기획자와 소유자를 떠나 대중들과 공유되는 순간,
그 유물들은 사회적으로 공감과 비판과 소통의 매개가 되면서 유물의 생명력은 재해석되고,
그렇게 당대의 공간을 뛰어넘고, 시대의 장벽을 가리지 않는 향기롭고 충만한 영감의 매개체가 된다.
우리가 바라보고 찬양하고 국보와 보물들은 결코 민초들의 <일상>과 시대의 <평범함>을 대변하지 않는다.
또한 그 국보와 보물들은 한정된 권력의 폐쇄된 소유와 고립된 천재의 <특별함>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그 평범하지 않은 정성들이 역사와 민초들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머릿속의 상상과 추상적인 말과 관념들이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지고 세상과 교류하는 순간,
그 국보와 보물들은 더 이상 개개인과 권력의 소유를 벗어나고 시대를 뛰어넘고, 공간의 한계를 극복한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역사를 해석하고 시대의 영감을 배우며, 우리들의 가능성을 되새김하게 된다.
5-3. 여백에 새겨진 겸손과 책임...
작고 작은, 세심하고 디테일한 정성이 남긴 의미를 동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작은 정성과 소소한 변화는 과연 시대를 변화시키고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었을까?
조화와 균형, 그리고 세심한 손길은 눈썰미와 정성과 완숙한 손놀림으로 충분히 보완이 된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시대의 정신으로 확장시키는데는 또다른 고집이 필요한 게 아닐까?
표현하고 알리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시선과 마음은 그곳을 지나칠 수 없다.
그가 남기고 싶었던 것은 내가 아는 것과 분명 다르겠지만, 느낌으로 마음으로 또다른 조각이 새겨진다.
아는 것과 아는 만큼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르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 게 세상사다.
게다가 작은 것과 커다란 것의 영향력은 늘 그렇듯 괴리가 존재하고 섣불리 大小를 재단할 수 없다.
고달사 국보 부도에는 남겨야할 공간과 채워야할 것들이 정연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조화되어 있다.
장대한 크기에 작은 조각들, 화려한 양식에 깊은 손놀림에도 의도하지 않는 공백들이 남아있다.
상징과 조각들로 채워진 유물은 아는 것과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지,
과연 하나의 유물에 불과한 것에 세상을 다 담을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우지 못한 공간과, 무수히 많은 유물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편화된 유물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런 괴리를 이 사람들은 어떻게 채웠을까 하는 점이었다.
자신의 만족과 세상의 만족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비우고 자신을 채워나갔을까?
어쩌면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 밖에 존재하는 더 큰 범위에서의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깨치지 않았을까?
미처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인정에는 어떤 커다란 믿음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겸손...
그 장대한 크기와 굵은 윤곽의 깊은 조각으로 채우지 못한 우주의 섭리에 대한 겸손은 아니었을까?
그 유려한 솜씨와 부드러운 손놀림이 건들 수 없는 완결적인 그 어떤 것에 대한 겸손이 체화되었을까?
고달사의 국보 부도가 내게 오래 기억되는 것은 그 장대한 크기와 호방한 기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은 공간과 여백들을 채워나갔을 정성과 미소와 땀방울에 젖은 세월에 대한 겸손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크고 작음, 유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넘어서서 자신이 해야할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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