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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기> 믿음, 수순, 내가 싫어하는 것들...110129

 

 

 

1. 믿음, 그리고 불신

 

1월 운세가 참 안 좋다고 나왔다.

가까운 사람이 배신을 한다는 내용의...

배신?

제3자가 가까운 사람을 배신했을 때 해결사 역할을 많이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이 나를 배신한다면??

 

나는 사람을 잘 믿는다.

그리고 그만큼 잘 속는다.

문제는 알고 속는 것과 모르고 속는 것...

알고 속는 것은 범위와 강도와 깊이가 나의 시야에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지만,

모르고 속는 것은 나를 속이려는 사람이 나쁘거나, 내가 무능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씩 뜯어볼까?

나는 책임에는 의무가 따르지만, 그만큼 권한과 재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한은 주지 않으면서 책임과 의무만 따진다면,

그 책임에는 충성과 진심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가 대하는 사람이 장남인가, 막내인가, 학교 다닐 때 경력은 어떤가 묻곤 한다.

막내에게는 칭찬과 포용이 필요하고, 장남과 리더에게는 신뢰와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임과 역할분담에는 신뢰와 아량이 전제되어야 하고,

상하위계와 관리감독을 통한 상벌과 비전의 공유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조직에 필요한 충성과 진심은 그런 복합적인 커넥션을 통해 유지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체계와 시스템이 갖춰졌다고 생각하면 전적으로 믿고 출발한다.

그러나 이 신뢰는 모든 것들이 상호 조화를 이룰 때 힘이 있는 것이지,

내 믿음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공유되지 못하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먼저, 나의 신뢰는 맹목적이거나 상대방의 무한책임을 전제하는 건 아니었는지 반성한다.

 

 

더군다나 말이 법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100에서 시작하지만,

맹목적인 무한책임을 부정하는 상대방은 이제 50에서 출발할지도 모르고,

책임과 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완되거나, 변질될 수도 있으며,

조직의 체계와 시스템은 애초부터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믿으려면, 믿음 이상의 의심이 필요하며,

확신을 가지려면, 지속적인 점검과 확인이 필요하지도 모른다.

이걸 나는 지금까지 편협한 생각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는지,

좋지 못한 습관이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반성해 본다.

 

 

왜냐하면 알고 속는다고 나는 포용하고 이해하려 하는지 몰라도

그것을 악용하려는 입장에서는, 나의 무능력과 무관심을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고,

더 이상의 포용과 이해는 상호 불신과 조직의 원심력으로 밖에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신의와 합리적 정의만 강조했지, 그만큼 관리 통제하지 못했다.

즉 신뢰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포용과 이해는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상대방을 나쁘다고 말하기 이전에, 나는 나의 무능력과 무관심을 충분히 반성해야 한다.

사람을 믿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고 관점이고 합리적 도덕일지 모르지만,

배신하고 불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능력이고 진정한 정의가 아닐까?

 

 

너무 많은 것들이 깨어지고 흐트러진 지금...

내가 상대방을 믿는 것 또는 믿고 싶은 것, 그리고 믿었다는 확신이

혹, 나의 나태와 무관심과 무능력을 변명하는 보호막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고 있다.

신뢰와 믿음에는 시스템과 체계만 중요한 게 아니라 지속적인 정성과 충분한 관심이 필요했다.

더 큰 믿음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뢰는 결과이지 과정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직에서도, 우정이나 사랑에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신뢰에 대해 냉정할 필요가 있다.

믿고 시작하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편하고 부드럽고 자유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결과가 불신과 의심과 배신이라면, 그것은 최초에 전제된 불신과 의심보다 못할 것이고,

의심과 불신은 변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깨어진 신뢰는 고통과 상실감만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더 ;

나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임이 분명하지만,

그 결과와 시선이 타인에 대한 의심과 방어기제를 풀어야할 이유가 아님도 인식해야 한다.

잘 믿어서 잘 속는다는 것은 변명과 핑계와 사치에 불과한 무능력의 고백에 불과하고,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는 말이 불합리하다거나 편협함 때문만이 아님도 인정해야 한다.

 

 

엊그제 ; 너무 믿어서, 애초 아무런 의심을 가질 수 없는 관계에서 오해를 받았다.

그것이 지금까지 위에서 말하고 있는 신뢰나 믿음과 질적으로 다를 수도 있겠지만,

충분한 관심과 정성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나의 어줍잖은 믿음 때문에 발생한 일이 분명하지만,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관계의 신뢰나 책임 이전에 더 큰 동인을 가질 수 있음을 간과한 결과다.

 

결국 나는 일에서도 나의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했고,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관계에 상처를 주었다.

이것 역시 나의 과신과 자만의 결과는 아닌지, 그래서 무관심과 무능력을 초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출발이 내 조직의 충성과 진심의 결여에서 시작되었다면 누굴 탓할 수도 없는 게 내 처지다.

권한과 책임, 의무와 권리, 그리고 안전장치와 체크 시스템에 대해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그것이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또 다른 불신과 오해와 의심을 불식시킬 해법이라 생각한다.

 

 

 

2. 수순과 절차

 

흔히 민주를 합리와 등치시키려는 시도를 많이 본다.

합리가 선이고 진리인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겠지만, 민주와 합리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지금 나는 민주와 합리의 보편적 의미를 규정하고 그 상관관계에 대해 논하는 건 아니지만,

수평적 연대에 기초한 강압적이지 않은 권위와 열린 네트워크, 그리고 보편적 정의에

민주만큼 합리적 절차도 없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왠 난데없는 민주 이야기냐고? 민주적 절차 - 즉 수순의 문제를 체크하기 위함이다.

수순은 합리적인 절차와 소통 가능한 네트워크와 독선에 의지하지 않는 설득을 요구한다.

복잡하게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

신뢰를 (아마도 맹목적 믿음일지 모르지만) 전제로 수순에 서툴렀음을 반성하려 한다.

 

 

나는 수순과 절차를 집요하게 관철시키려는 대표적 조직을 관청과 대기업으로 본다.

역으로 개인적 관계일수록, 집안이나 친인척 관계일수록,

그리고 중소기업일수록 수순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의에 앞선 혈연과 친밀성, 설득이 배제된 권위가 관철될 수 있는 개연성이 많고,

게다가 오랜 시간 혹은 충분히 깊이 있는 믿음을 전제로 형성된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조금 단순화 시켜 수순에 대한 문제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비교로 좁혀볼까?

대기업을 공룡에 비유했던 시절이 있다. 90년대 초반과 IMF 시대 이야기다.

수순과 절차에 발목잡힌 대기업이란 공룡은 복잡한 체계로 느리고 가볍지 못하다고 비판받았다.

그 변화의 결과가 아웃소싱과 수평적 팀웍, 소유와 경영의 분리 등의 도입이다.

 

이에 반해 중소기업은 결정이 빠르고 임기응변에 강하며 능동적일 수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래서 빙하기에 공룡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몸집이 작은 포유류는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엄밀히 빙하기에 개체의 연속성을 유지한 생물은 기온의 변화에 둔감한 일부 생명체에 불과하다.

온도의 변화에 민감한 육상동물인 대부분의 포유류와 공룡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생명체는 돌연변이에 불과하며, 인간도 돌연변이를 통해 진화했다.

 

 

왜 이런 말을 하냐고?

중소기업에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의 산업계 판도는 이미 중소기업이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절대 그러지 못하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문제가 터지면 중소기업에는 결정적 한계들을 노출하게 된다.

결정이 빠른만큼 실패할 확률이 높고, 임기응변이 좋은만큼 지속적인 안정을 가지기 어려우며,

개체의 능동성은 위계질서를 혼란시키고, 책임소재를 모호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오히려 대기업의 분명한 위계질서와 책임한계, 그리고 복잡한 체크 시스템이 더큰 장점은 아닐까?

수순이 정교한 만큼 책임소재도 분명하고, 실패할 확률도 작으며, 오해의 소지도 줄일 수 있다.

오늘의 주제인 신뢰와 믿음도 명쾌한 판단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과부족에도 냉정할 수 있다.

선택과 집중, 소유와 경영, 능동적 변화와 시장의 선점은 기업의 규모가 아니라 체질의 문제이다.

 

즉 기업이라는 조직에 필요한 것은 ;

수평적 연대에 기초한 권위와 열린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는가?

합리적인 절차와 매뉴얼화 된 수순을 관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 등이 중요하지

경영자와 말단 사원의 친밀도나 정서적 공감, 단순한 보고체계와 결정 시스템은 아닐 것이다.

업무의 전문성과 집중성에서 만들어지는 깊이와 밀도역시 기업의 규모가 장단점을 규정하지 못한다.

 

 

나는 지금까지 내 나름의 민주적 원칙과 조직에서의 책임과 신뢰에 대해 전제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바랐는지 자문하고 반성하고 검토하고 있다.

민주적이라 말하면서 수순과 절차에 대해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신뢰와 책임을 말하면서 무관심과 방종을 장려하지는 않았는지,

그것으로 인해 조직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결집을 약화시킨 건 아닌지 반성하고 있다.

 

또 하나, 엊그제 내가 강조했던 중요하고 소중한 관계에서 수순과 절차를 무시한 게 없는지 묻고 있다.

어쩌면 중요하고 소중한 관계일수록 수순과 절차는 더더욱 중요해질 수 있음을 간과했다.

특히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고 층급이 나뉘어지는 조직생활에서 수순과 절차는 곧바로 힘인데

나는 어설픈 신뢰와 믿음을 남발하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고통과 오해를 주고 있으며

그만큼 고통을 받고 있다.

 

원칙을 지키고 수순을 고집하는 게 답답하고 느리고 무겁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세가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고, 상황을 단순하게 드러내며

목적지에 다다르는 시간을 단축하게 한다.

나는 아직 충분히 훈련되어 있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일과 관계에 정성과 관심과 궁극적 책임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는 고백일 것이다.

 

 

 

3. 내가 싫어하는 것들?

 

나를 끌어가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본능도 있고, 호기심도 있고, 명예욕도 있을 것이다.

음주가무에는 서툴지만, 여느 한국인처럼 내기를 즐기고 다재다능을 호평한다.

그리고 싫어하는 것도 있다.

그 하나가 부끄러움이고, 또 하나는 오해이며, 마지막은 무능력일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거꾸로 뒤집으면

부끄러운 행동을 싫어하고,

오해하거나 오해받는 걸 정말 싫어하고,

내가 무능력하다는 이야기 듣는 걸 용납하기 싫어한다는 말이다.

또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싫어하는 것은 이 세가지를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최근, 그리고 엊그제까지 일어나는 일련의 일에서 나는 그 세가지를 모두 고백해야만 했다.

나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벌어진 일을 부끄러워하며, 게다가 오해의 굴레까지 둘러쓰고 있다는 말이다.

후후~~~ 최악이다.

어쩌면 지금의 일들로 인해 나는 나의 바닥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만 생각해보면 좋은지 나쁜지 모를 많은 것들도 아울러 돌이켜 본다.

매듭을 툭툭 끊어내는 것보다, 하나씩 하나씩 끝까지 풀어내는 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하나씩 둘씩 얼른 얼른 버리고 비우는 것보다, 이것저것 몰고다니며 하나도 버리지 않는 건 어떤지,

과거에 연연하는 것보다 덮어둘 것은 덮어두고 앞일을 우선 생각하고 대처하는 것은 또 어떤지,

결과의 승패와 흉복보다는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는 게 좋은지 나쁜지,

 

어떤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대처하고 냉정을 잃지 않는 게 좋은지 나쁜지,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게끔 도모하고 강요하고 선도하는 것은 정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자기자신과 현재의 관계를 때로는 분리하여 사고하고 시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건 올바른지,

선후좌우 대소경중 강약완급을 고려하려는 자세는 문제해결에 도움은 되는지,

 

내용과 실적을 강조하면서 형식을 가벼이 여기고, 성실함을 저급하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것이 혹시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를 위한 포석은 아닌지,

남을 이해한다는 명목으로 타인과의 거리감 혹은 무관심을 변명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집과 독선을 싫어하면서도 혹시 내 자신은 자만과 오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미래설계를 위한 준비도 없으면서 지나치게 현실을 낙천적이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건 아닌지,

숱한 자문을 되풀이하면서 현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의 답답함을 떠나 허전하고 막막하고 공허할 따름이다.

 

 

글세~~~

맥이 풀린 기분이다.

이번 일에서도 느꼈지만, 무엇을 해 놓고나서 그 다음에 다른 것을 한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이번 일만해도, 이미 오래전부터 징후를 예상하고 있었고, 1월에는 수습하려고 생각했다.

외부적인 일을 끝내고 나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생각을 했을 때 시작해야 했다.

그랬다 하더라도 이번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물론 복잡다단하게 얽힐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대처가 쉽거나 빨랐을지도 모르고,

또는 어설픈 개입과 봉합으로 문제를 더 크게 잠복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지금, 맥이 탁 풀린 지금도 구정 연휴 때 생각해보자고 미루고 있다.

 

시기를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 전부일지도 모른다.

타이밍은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이유가, 시간을 놓치는 것은 모든 것을 놓친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내게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과 반성들 속에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들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지적이나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자인하고 고백한 것들이다.

 

타인이 무능력하다고 단정하거나 질타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내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비참한 일이다.

언젠가 기억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부끄러움이라는 걸 느껴본 적 있다.

얼마전 내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하하하

 

그리고 참 참기 힘든 게 오해고, 그래서 타인들 간의 오해도 듣기 싫을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듣고 흘리는 편이지 일일이 귀담아 두질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오해란 적극적 해명과 집요한 설득보다 넉넉한 시간을 필요로 할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필요한 오해가 불신과 상실을 증폭시킨다면 그런 불행의 희생양이 되고픈 맘은 없다.

그런 오해를 받아본 경험이 거의 없어선지 참 쓰라리지만 나를 돌이켜보는 수밖엔 없는 것 같다.

 

 

구정 연휴가 긴 모양이다.

이리 많은 생각과 상념이 떠나지 않은 1월이니 말이다.

그때쯤이며 이런 생각들이 정돈되고 머리는 수습되며 가슴은 새로 뛸까?

조금 더 깊은 추락이 있어야 다시 힘을 얻으려나?

아직은 수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