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타키나발루는 쓰나미로부터 안전하겠지?
네~ 태국 푸켓 반대편에 있으니까요...
세계 3대 낙조로 꼽힌다는 말을 듣고 나는 코타키나발루(이글에서는 “KK”로 부른다) 위치를 상상했다.
비행기에 올라 시차가 한시간밖에 나지 않음을 듣고서야 나는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KK는 서말레이시아 말레이 반도에 있는 게 아니라, 보르네오섬 동말레이시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번의 착각이 정답을 말한 셈... 오발탄이 명중되어도 이렇게 정확할 수 있을까? ㅎㅎㅎ
<말레이시아 위치... 작지만 넓고, 적지만 강한 나라가 아닐까? 태국 푸켓은 말레이반도 위쪽에 있다. 2004년 이곳의 쓰나미는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판이 아닌, 유라시아판과 오스트레일리아판과의 충돌에 의한 것이었는데 큰 착각이었다...ㅠㅠ 아무튼 코타키나발루는 말레이시아의 동쪽끝, 보르네오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시기도, 장소도, 프로그램 어느 하나 맘에 들지 않았지.
오랜 장마기간에 이어진 휴가철과 또 휴가들이 끝난 시점, 주중 6일, 또 하나 월말...
여기에 9월초의 추석연휴까지 묶으면 나는 거의 두달을 아무 일도 못하고 끙끙거려야 한다.
게다가 KK는 북위 5도에 위치한 매우 무더운 곳이다.
우리나라보다 시원한 곳에 휴양과 휴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 뜨거운 땡볕에 36홀씩 4일 운동...
<열대성 기후로 태풍이 형성되는 필리핀 남서쪽에 위치해, 아열대성 기후와 달리 자외선은 따갑지만 습도가 없어 그늘아래서의 바람은 선선한 편이었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말레이시아였지만 나는 비행기 타는 그 순간까지 KK의 위치도 몰랐고
말레이시아와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검색하거나 해야 할 그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하루 전날에는 운동까지하고 출발 당일 에둘러 짐만 싸 나왔다.
그래도 새로운 곳이고, 피할 수 없는 일정이라면 그 시간을 채우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일 뿐...
그렇게 떠났던 며칠... 그 기간을 이제야 차분한 마음으로 돌이켜보려 한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충분치 않고 단편적 정보에 의존하겠지만 말이다.
2.
<주석>잔들 있으시지요? 혹시 지금도 사용하고 계신 분 손들어 보세요...
패키지여행은 아니지만, 편의를 위해 현지 가이드를 요청했기에 단편적인 설명에 만족해야 했다.
흔히 장식성과 보냉효과 때문으로 맥주잔으로 알려진 주석의 효능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보냉 뿐 아니라 살균과 정수효과가 탁월해 우리가 사용하는 치약용기의 내부 은빛 코팅제가 주석이며,
우리가 즐겨먹는 참치나 과일 캔 내부의 코팅, 그리고 의약품 연고제 용기의 내부 코팅제일 뿐만 아니라
보온병의 재질이면서 정수기의 마지막 필터제로 사용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무척 의외였다.
게다가 주석은 안료와 오염방지제이면서 전자기기 회로기판과 땜납에도 사용되는 원자재이기도 하다.
그 주산지가 말레이시아, 특히 서말레이시아(말레이 반도)이며 우리나라의 주수입처라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당장에 실험을 해봤다. 각종 컵에 같은 크기 얼음을 두세조각씩 넣고 어느 것이 빨리 녹는가 하는...^^ 맨 오른쪽 아래 자기성컵이 가장 천천히 녹고, 크리스탈컵이 그 다음... 주석잔속의 얼음이 가장 빨리 녹는다...ㅎㅎ 의외지? 보냉 효과와 열전도성은 애초 다른 개념인데 내가 혼동했다... 주석잔에 뜨거운 커피를 담으면 입술이 달라 붙는다. 뜨거워서...ㅋㅋ>
단, 천연고무가 15% 이상이면 라텍스란 명칭을 쓸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이 순도와 함량이듯이
주석잔은 많지만 실제 순도가 높고 함량이 많은 제품을 구별할 줄 모르고 일상적인 용도를 몰라 그렇지
우리들 생각보다 의외로 일상생활과 밀접하고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주석가공으로 유명한 로얄 셀랑고르 제품은 순도 99%를 가공할 특허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여행지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기념으로 하나쯤 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
내 귀가 얇은 것일까? 아니면 여행이라는 일탈이 마음을 느슨하게 만든 것일까?
결국 샀다. 면세점에서...^^
이어지는 이곳의 특산물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 보르네오섬인지 말레이시아인지 모르겠지만...
인류와 가장 가까운 DNA구조를 가진 숲속의 사람이란 뜻의 <우랑우탄>... 그 이름이 말레이시아어라 하고,
이곳 보르네오 섬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혹시 골프장에서 볼 수도 있다는 호기심에 열심히 찾았지만...쩝
힌자위 전체가 콜라겐이어서 아무리 삶아도 노른자는 익지 않는다는 알을 낳는 <청거북>의 회귀지이고,
꽃중에 가장 심한 악취가 나는 <라플네시아>란 기생식물이 분포한 곳이 말레이반도와 동남아 일대 섬인데
지름이 1m가 넘는 거대한 꽃을 피우고, 썩은 냄새는 꽃가루를 유포할 수 있는 파리의 유인전략이고,
맹글로 나무의 뿌리만 먹고 산다는 <긴코원숭이>와 세계3대 <반딧불이> 서식지가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그래~ 여행이란 이렇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지 못한 것들을 바라보고 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연, 예술, 역사, 문화와 인생에 대한 잡다하고 어지러운 정보들이 자극하는 호기심에서 시작할까?
들고나온 필름이 아까워, 36홀 버틸 체력의 고갈을 핑계로 도망쳐 나온 반딧불이 선택관광에서 듣는 말들.
저기 보이시나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긴코원숭이의 하얀꼬리와 하얀 엉덩이가?
찾으셨나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지만 사진촬영이 불가할 정도로 작은 반딧불이들의 향연이?
<배불뚝이 긴코원숭이... 맹글로브 나무 뿌리를 먹기 때문에 그 독성으로 항상 배에 가스가 차있다고 한다. 수컷 하나에 일곱여덟의 암컷이 있는데, 맹글로브의 독성으로 수명이 길지 않아, 수컷의 성기는 항상 발기된 상태라고... 이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주면 죽는단다. 소화를 시킬 수 없어서...^^ 그나저나 이곳 가이드들에게 놀랬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듯, 이 밀림에서 긴코원숭이를 찾아내는 실력에...>
캐나다, 호주와 함께 3대 서식지라는 이곳 보르네오 섬 강변을 따라 나선 길에 반딧불이들을 찾아본다.
나는 처음, 어두컴컴한 강변 양옆으로 화려하게 펼쳐질 누미나루 같은 환상을 기대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가까이서, 반짝이는 반딧불이들의 애절한 몸짓을 바라보며 내뱉은 짧은 함성과 탄식이 있을 뿐,
스쳐지나가는 눈길에 화려한 빛 잔치가 될 수 없음을 안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치 않은 것임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만 담을 수 있다는 가이드 말마따나 나그네의 시선을 붙잡은 건 잠시의 망각이었지,
기대와 호기심을 채워주는 환상은 아니었다. 이런 여행은 늘 그렇듯 혹시로 시작해 역시로 끝나는 걸까?
느리지 않은 속도로 일어나는 바람에 섞인 습습한 향기가 오랫동안 묶인 동심을 자극하는 걸로 만족한다.
3.
나에게 말레이시아란 나라는 무엇으로 기억될까?
차범근 시대의 축구를 통해 처음 들었을까?
80년대 세계체제론과 주변부 자본주의론이 득세하던 시기 비동맹국가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보다는 내게 있어 두 번째 충격이었던 98년 외환위기 당시 마하티르 총리의 일성이 훨씬 강력하지?
그리고 우연히 접한 TV 다큐프로에서 알게 된, 이슬람이 국교임에도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는 점과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이면서 안정된 정치체제와 사회복지 시스템을 갖춘 점 등이 관심을 불렀지.
14C 말라카 술탄국으로 통합된 말레이시아는 1511년 포르투갈의 진출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거점이 되고, 1848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3년 대동아공영을 주창한 일본의 침략, 다시 1945년 일본의 항복이후 보르네오섬 KK지역 등은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편입되고, 1957년 말레이시아로 독립한 이후 필리핀, 인도네시아와의 갈등을 겪으면서 보르네오섬 일대까지 포괄하여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완성된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주체적인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지 못했던 나라이지만, 다양한 민족과 종교, 많지 않은 인구와 짧은 역사, 그리고 크지 않은 경제규모에도 불구하고 비동맹국가의 일원으로 세계화의 거센 바람과 세계투기자본의 공격을 독자적으로 이겨내며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성장하고 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역사와 무한한 자원? 아니면 신생자주국가로서 이를 영도했던 강단있는 지도자? 무엇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고 있을까?
<말레이시아 국기... 영국기 유니언잭과 미국 성조기 도안에 따랐는데,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교를, 노란색은 왕실을 상징한다. 파랑색 사각형은 영연방 일원을 뜻하고, 빨강색과 힌색 13줄은 13개 주를 뜻한다. 그리고 가운데 별의 빛살 14개는 13개주와 연방정부의 통합을 의미하며 1963년 제정, Jalur Gemilang 영광스러운 스트라이프라는 애칭을 가지게 되었다...>
말레이인 50%, 중국계 25%, 인도계 8%, 원주민 10%와 중국계 등과의 혼혈로 탄생한 페라나카인으로 구성된 말레이시아는 이슬람이 국교이지만 불교 20%, 힌두교 6%, 그리고 인구의 9%가 기독교를 믿는 나라다. 첨언한다면 인도나 스리랑카의 소승불교의 원시적 형태의 불교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인도보다 더 철저한 힌두교 형태와 조직, 문화가 원시적 형태로 보존되어 축제로 승화된 곳이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가 변형되지 않은 원시적 형태가 보존된 에티오피아 등의 아프리카 지역처럼 불교와 힌두교의 발생지보다 더 근원적 형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생활 속에, 축제로 살아있는 아이러니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말레이시아이기도 하다.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노예적 굴종의 무의식적 전승일까? 아니면 순수함의 발로일까? 그들에게 전통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이동중에 보이는 이슬람 사원... 말레이시아에서 기독교 혹은 카톨릭을 믿는 사람들은 보르네오섬쪽에 집중되어 있어 작은 교회나 성당도 자주 보인다... 절도 있고, 사원 등도 있지만 이곳에서 보이는 종교건축들에서는 오랜 역사를 느끼기 힘들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인 11조는 성당이나 교회에 헌납되지만, 이들과 같은 뿌리에서 성장한 이슬람은 11조만큼 혹은 그 이상을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 성당이나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음식으로 대접하기도 하고 비용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미국이나 서방에서는 그 자금이 테러자금으로 형성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악의에 찬 누명에 불과하고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이슬람 축제 기간 중에는 <오픈 하우스(Open House)>라는 게 있어 모든 종교와 종교인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그들이 보존하여 지키고 있는 불교, 힌두교 등의 축제도 역시 오픈 되어 있다. 70여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적 구성에 기반한 짧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공존과 조화, 그리고 관용의 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4.
나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장기독재를 해왔던 마하티르 총리에게서 두가지를 기억한다.(13개 연방주와 3개의 연방직할지로 이루어진 말레이시아는 9개주의 술탄들이 5년 임기를 주기로 돌아가며 국왕에 취임하는 입헌군주제이면서 총리가 내정을 총괄하는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다) 하나는 <아시아적 가치>의 강조와 <와와산 2020 (Vision 2020)>이라는 독자적인 국가발전 전략이다. 퇴임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놓치 않았지만 그의 퇴임연설이 기억할만 하다 ;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자원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전세계에서 우리처럼 게으른 국민들도 없을 것”이라는 말... 우리나라로 보면 박정희 전대통령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그를 통해 많은 생각을 해 봤다. 지도자 한사람의 영향력과 정책적 선택이 한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까? 하는...
<코타키나발루 주변의 해상주택... 어업에 종사하는 원주민들이 주로 거주한다고 한다. 자동차 가격보다 높은 보트를 두세척씩 보유하고 있어 생활수준이 낮은 건 아니라는 가이드의 설명... 나무말뚝만 남아있는 곳들도 있지만 거래가 되고 있다고...>
말레이시아는 마하티르 총리의 고백처럼 세계에 큰소리를 치면서도 고립되지 않고 경제력을 보존할만한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또한 고무, 주석, 팜유, 석유, 목재 등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고 있지만, 독자적 브랜드 자동차 생산국이면서 F1 그랑프리에 사용되는 모든 휘발유를 공급하는 패트로나스 정유회사(2004년까지 세계에서 제일 높았던 쌍둥이빌딩 소유사) 등 제조업 능력을 갖추고 있는 곳이 말레이시아고, 2020년까지 선진국 진입을 위해 원자재 수출에서 벗어나 전기/통신/수송기계 등 제조업과 관광업을 한차원 끌어올리려 노력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패트로나스 트윈타워... 한국과 일본의 경쟁심을 유도하기 위해 마하티르 총리가 각각 한동씩 시공발주를 하여 공기를 앞당긴 것으로 유명하다... 두바이의 버즈칼리파, 상하이와 광저우 홍콩 국제금융센터, 난징의 지펭타워, 대만 타이페이의 101타워 등 중동 산유자금과 중국의 성장에 밀려 지금은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빌딩으로 밀려났다... 세계10대 빌딩 나머지 두개는 트럼프 국제호텔과 시카고 윌리스타워다...>
말레이시아가 제조능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두가지 연유가 있었던 거 같다.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상교역로의 중간에 말레이 반도가 위치하고 있고, 그 지리적 이점은 1511년 포르투갈의 진출 이후 네덜란드, 영국을 거치면서 상업과 금융시장이 성장하고 여기에 화교의 자본력이 가세하여 영국, 미국, 일본에 이은 네 번째 규모의 자본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 싱가포르다(1965년 독립했지만, 그것은 경제교류의 단절이 아닌 정치적, 종교적, 출신민족적 갈등이었다). 또 하나는 70년대 일본이 인플레이션을 해소하기 위해 동남아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면서 만들어진 아시아의 4룡 중 싱가포르 제조 원자재를 공급할 수 있는 곳이 말레이시아였다(80년대 일제 계산기 제조국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Made in 대만과 싱가포르였고, 그 다음 등장한 나라가 말레이시아다. 이에 반해 독자적으로 중화학공업과 전기전자산업에 투자했던 한국은 계산기를 뛰어넘어 곧바로 80년대 중반이후부터 세계시장에 등장한다).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점령지... 일본은 패전 이후에도 동남아지역의 기반시설에 지속적인 투자와 생산라인 이전을 통해 각국의 경제적 지표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사족 : 이 범주를 가만히 보면, 16세기까지의 왜구와 6세기 백제의 활동범위와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두가지 역사적이고 정치적 배경에서 말레이시아는 교묘한 선택을 했다. 하나는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형성된 민족의식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지만, 그들은 영연방국가의 일원으로 남았다(싱가포르도 마찬가지다)는 점이다. 또하나, 말레이시아만이 아니라 1940년대 일본에 강제점령되어 지배를 받았던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오늘날 일본 브랜드의 생산기지이거나 일본으로 원자재 수출을 통해 유지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도 그 중 하나라는 점이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 생존을 위한 유연한 선택이었을까? 식민지배자들의 유연한 양보였을까? 수백년 혹은 수년 동안의 식민지지배에서 애초에 그들에게는 독립과 자주라는 명분은 민족의식이 아닌 정치적 이슈에 불과했을까? 그러면서도 마하티르 총리에 의해 아시아적 가치와 투기자본과의 전쟁을 선포할 이유와 힘의 근원은 무엇일? 풍부한 자원과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제조능력... 그것이 말레이시아가 세계투기자본으로부터 독자노선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 되는 것일까?
<코타키나발루 시내... 260만명의 사바州 주도로 인구 30여만명이 살고 있다... 저 자동차들이 말레이시아산이고, 2000cc 미만임에도 원화기준 3~4천만원의 고가라고... 국산 렉스턴 등은 8~9천만원으로 높은 관세가 적용된다고 한다... 기름값은 리터당 700정도로 국내의 1/3가격이지만, 산유국으로서는 낮지 않은 가격이라고...>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되었다가 1965년 독립한 싱가포르. 1959년부터 1990년까지 리콴유 총리에 의해 펼쳐진 장기독재속에서 고속성장하며 7~80년대 홍콩, 대만, 한국과 함께 아시아 4룡, 2차대전 이후 개발도상국의 모범이 된 이곳도 말레이시아와 함께 고민해야할 나라다. 부존자원없이 중계무역과 제조업(25%), 그리고 관광산업(인구 400만명에 1년 관광객 1억명)과 금융업 등으로 성장한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신세에 지금도 식수를 말레이시아로부터 공급받고 있지만 올해 1년 GDP에서 말레이시아를 추월할 것이라고 한다.(2600만명의 말레이시아 GDP가 2050억불, 말레이시아 대비 1/478 면적을 가진 싱가포르가 2100억불) 중국과 홍콩의 관계보다 영국과 북아일랜드 관계, 또는 인도와 방글라데시와 비슷한 감정을 가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가깝고도 먼나라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배(싱가포르 37000불, 말레이시아 11000불) 넘게 차이 나고, 장기성장과 공평한 분배에서 진정한 승자와 궁극적 완성의 표본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레이시아의 성장과 독자노선에는 싱가포르의 거대한 금융시장이 배경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5.
말레이시아는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나라는 아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를 통해 80년대 해외지점이 생기고 가까운 해외관광지로 각광받으면서, 어쩌면 이들 세나라를 벗어나 90년대부터 선진국이 아닌 곳에 조기유학을 보내기 시작한 곳이 말레이시아 정도였고, 실제로 뉴스를 통해 그나라의 사정을 들을만한 기회가 없을 정도로 조용한 나라이기도 하다. 7~80년대 축구경기를 제외하면 한동안 정치적 변동도 없었고, 마하티르 총리와 리콴유 총리 정도만 들었을 뿐이지. 관광과 교류의 확대속에서 단편적 소식과 TV 다큐프로 등을 통해 그들의 문물을 하나씩 접하면서 나에게는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장기독재의 폐해를 그들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 식민지배의 잔재에서 그들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을까? 또한 이슬람 국가이면서 조화로운 공존과 성숙된 관용이란 개념이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 말이다.
자체적 문명을 꽃피우기 전부터 유지되었던 오랜 식민지배에서 그들이 가지는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들에게 이슬람국가에서 어떻게 불교와 힌두교의 원시적 전통은 보존되고 있을까? 화교와 말레이인들, 그리고 원주민과 혼혈인들은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 영연방의 일원이면서 일본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또한 경쟁관계이면서 협력관계인 싱가포르를 보면 누가 누구를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성장은 풍부한 자원의 문제일까? 아니면 정치지도자의 현명한 판단과 정책적 선택의 문제일까? 국민성의 문제일까? 종교의 문제일까? 등등등...
나는 이러한 문제를 통해 우리나라의 현재와 과거의 정치와 정책에 대해 비교를 해보곤 했다. 일례로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는 국가부도 위기에서 IMF의 회생프로그램을 감수해야만 했다. 외국자본에 기업을 팔고 구조개혁의 고통을 감수하며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이에 반해 우리보다 먼저 외환위기에 처했던 말레이시아는 해외의 말레이시아 통화인 링깃의 국내유입을 통고(이때 국내에 신고되지 않은 화폐는 휴지조각으로 선언한다)하고 모든 외화의 환전을 1년 이상 동결하여 외환위기를 극복한다. 물론 그 댓가로 경기침체의 고통을 받기는 했지만 금리인하와 통화량 확대공급, 그리고 공공지출의 확대를 통해 다시 재기를 한다. 그리고 그 성과는 1999년 GNP 737억불, 1인당 GNP 3,248불에서 → 2010년 GDP 2,000억불, 1인당 11,000불로 나타나는데, 이런 성장속도는 우리나라 4,400억불 → 1조, 1인당 9,400불 → 20,000만불(2008년 OECD통계 PPPs/구매력평가환율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은 GDP 1조3,444억달러에 1인당 GDP는 27,658달러다)전후 보다 성장, 회복속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물론 나는 말레이시아와 우리나라의 단순 비교를 통해 그 나라를 평가하고 바라보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가치가 있고,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비교하는 지표들이 완성된 것일 수도 없고 그것이 지상명령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현재 미래를 밝게 바라보고 있으며, 아직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모든 국민들이 누리고 있다. 또한 우리보다 낮은 국민소득이지만 그들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우리나라 출신의 가이드 등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경제적 풍요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보았다. 싱가포르와 홍콩에 인재를 뺏기지 않기 위해 산업선진국으로 도약하려 노력하며, 가난하지 않은 동남아 국가가 아니라 동남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허드렛일은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태국인들이 하고 자신들은 부유한 복지혜택을 받는 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다.
<내가 묶었던 마젤란 호텔... 국기와 주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다. 물론 관광지여서가 아니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메르데카 데이-인도네시아도 똑같은 말을 사용한다(?)-를 기념하여, 한달 넘게 게양하고 있다고... 들뜬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지만, 딱 하루 국기를 게양하는 우리의 광복절이 생각났다...>
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①그린란드, ②뉴기니, ④마다가스카라, ⑦혼슈(=한반도 면적), ⑨그레이트 브리틴(영국), ⑮루손(필리핀), ⑰쿠바, ⑱아이슬란드, ⑲민다나오(필리핀))이라는 보르네오 KK에 와서 많은 생각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북위 5도에 최저기온 21℃, 일일최고기온 32℃, 태풍의 진원지 아래에 위치해 <바람아래의 땅>이라 불리는 사바주 키나발루산 자락에 위치한 코타키나발루에서 복잡한 마음에 땀을 씻고 있다. 반딧불이를 보기위해 나선 2시간여의 버스여행에서 필리핀, 태국 등지에서 보았던 비슷한 건축과 자연풍경과 사람들을 보고 있다. 또한 영국으로부터 독립 54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거리거리마다, 드문드문 떨어진 인가와 시내 할 것없이, 어느 한 곳 빠짐없이 한달씩이나 게양되고 있는 말레이시아 국기와 사바 주기를 보고 있다. 그리고 열대지방 특유의 느림과 낙천이 살아있지만 중국의 해남도 등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에서 느껴보지 못한 정돈되고 차분한 여유와 이슬람 사원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 언듯 동북아의 금융 허브를 꿈꾸는 인천경제자유구역에서 일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허황된 전략인지도 생각하고 있다. 400년의 상업적 교류를 통해 성장한 싱가포르나, 100년 동안 중국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홍콩과 같은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을 가지지 못한 인천이 택지형성이나 초고층 건물 등의 하드웨어나 지리적 조건으로 과연 그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다. 이곳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오버랩하면서 말이다. 필리핀이나 대만, 태국 등과 말레이시아는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을까? 우리와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일까? 같은 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점은 또한 무엇일까?
<주식은 쌀이고, 요리의 중심은 닭고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왼쪽 스프도 닭국물이다...^^ 이슬람의 영향-청결하지 못한 생존환경-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그렇다고 소고기 요리가 발달하지도 않았다... 김치는 입맛에 맞았고, 의외로 불고기란 이름이 정착되고 있다는 기분...>
현재의 불안함과 불투명한 미래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 우리나라와 나를 생각하면서, IMF 당시 DJ의 정책적 선택과 우리들의 판단은 최선이었는지, 수출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과 미국과의 FTA에 목을 매는 현재 정부의 경제정책과 정치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장기독재의 비민주성, 폐쇄적인 경제노선, 식민지배의 굴종과 민족의식, 종교적 극단과 인종적 갈등 등의 나의 상식은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하고 있다. 역사와 예술과 사상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려는 나의 시도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척 혼란스럽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나라를 읽는 나의 창=window일지 모르겠지만, 말레이시아인들의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노선의 원천이 무엇인지 해답을 내리지 못하겠지만, 그들에게서 나는 밝은 미래를 향한 꿈을 느끼고 있다. 조화로운 공존, 성숙한 관용의 힘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어떻게 운용되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다. <다양성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말레이시아의 실험은 그런 면에서 내게 여전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나라다.
<제대로 된 석양을 보지 못했던 이번 여행... 여러면에서 많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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