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황 탓일까, 컨디션 탓일까, 그도 아니면 맘의 문제일까?
일체유심조라... 모든 게 맘먹기에 달렸다지만, 맘을 먹어도 안 될 건 안 되는 게 현실인 모양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운동(?)에 돌입한 게 한두어달 됐지만, 여전히 1시를 넘기기 일쑤고,
일찍 퇴근해야 일찍 잘 수 있다는 강압적 주문만큼 퇴근 시간은 앞당겨졌지만
가끔 체력이 충만한 날에도 숙소에 올라와 TV 리모콘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래 오늘은 뭔가 다른 걸 해야만 될 것 같다는 간질간질한 유혹이 충만한 걸 보면
바쁘지 않았던 하루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결국 내일로 그만큼 많은 일을 미뤘다는 말이니까...) 드디어 의도적 게으름에 찌들고, 습관적 시체놀이에 익숙한 몸을 이끌고 문밖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말하는 입과 바라보는 눈 외에는 세상사와 쉽사리 타협하는 저질(?) 체력이지만 오늘은 볼링을 쳐보리라.
한동안 비축했던 기름기 제거가 목적이 아니라, 머리에 낀 노폐물 제거에 최선은 몸뚱아리를 굴리는 것이니, 볼링핀이 깨져라 몸이 부서져라 체력을 학대할 의지는 없어도 땀 몇방울 만큼은 기필코 떨어뜨리고 오리라, 그렇게 맘먹고 볼링공을 질질 끌며 숙소의 지하 볼링장에 도착하니 벌써 11시 하고도 반이 됐다.
생각해보면 가까이 있다는 거,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지 않음의 다른 표현일 때가 많다.
게다가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의 진짜 문제는, 그 맘을 먹는 게 너무 어렵다는 말이고...
왜냐고? 애초부터 세상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라는 건 가깝고 멈, 맘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맘을 먹는 데는 왜 그리 달라붙는 조건이 많아지는지,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도대체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조건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그래서 오늘도 묵묵히 걷고 있는 모든(!) 사람을 나는 무척이나(!) 존경한다^^)
또한 우리는 가끔 가능성이나 꿈, 목표를 이미 달성한 현실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개연성과 확률, 혹은 그런 착각과 위로도 없다면 얼마나 각박하고 무미건조 하겠는가마는, 자신의 의지대로 맘먹은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인이 얼마나 많을 수 있으며, 지성적 절제라는 것이 생각만큼 쉬울 수 있을까?
아무튼 가깝다는 말 때문에 무뎌진 긴장과 또렷한 목표의식의 부재가 주는 안이함을 떨치기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숙소 지하층에 볼링장이 생기고, 언제든, 맘만 먹으면 볼링을 실컷 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은 4~5개월 동안 세 번의 방문으로 이어졌고, 드디어 오늘,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 네 번째 의지실현에 도전하고 있다.
2.
벌써 네 번째라고 익숙해진 것들도 많다.
15년 동안 신지 않았던 볼링화는 쫄아들만큼 줄어들어 하우스 신발로 갈아 신는 것도 멋쩍지 않고,
15년 동안 쓰지 않던 볼링공도 충분히 19m 레인을 굴러가 핀과 부딪쳐도 부서지지 않음을 확신하게 됐고, 왼발을 먼저 내 딛었는지, 오른발을 내 딛었는지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4스텝, 5스텝도 이해됐고, 팔에 힘이 없어 볼을 놓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서도, 볼이 도랑창으로 굴러 떨어질 때의 창피함에도 당당하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 레인에서 무지막지하게 훅을 걸어 스트라이크를 치는 바로 그때, 멋진 폼으로 슬라이딩하면서 부드러운 릴리즈에 격하게 리프팅 된 나의 첫 번째 볼은 도랑에 퐁당 빠졌지만...^^
절치부심, 와신상담... 나를 모르는 그에게 무엇을 보여줘야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긴장하고 있다. 나는 나의 세계에 빠지기 위해 이 레인위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타인의 시선을 경계하고 관찰한다. 그도 그의 세계에 빠져 나와 똑같은 혹은 차원이 다른 고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몸은 안 되는데 마음은 앞서고, 마음은 다스려지는데 몸에 밴 자세가 없으니 균형도 리듬도 깨지는 거지? 오로지 남는 거라곤 자기변명과 안면몰수를 위한 포커페이스 유지를 마인드 컨트롤이라 굳게 믿으면서 두 번째... 스트라이크... 크흐~ 남들은 스트라이크인데, 나는 스페어 처리를 했을 뿐이다.
그래~ 이 정도면 시작이 나쁘진 않네... 또다시 거듭되는 마인드 컨트롤... 내가 믿는 건 그것뿐이니까...^^
나의 구질은 스트레이트성 훅, 골프로 말하면 드로 구질이고 흔히 숏훅이라고 부를 걸??(아마도...)
지난번 도랑(거터라고 부르지?)에 하도 빠진 이후론 예전과 다르게 한가운데 도트에서 한쪽 정도 오른쪽에 서서 두 번째 스포트 안쪽을 겨냥한다. 조금씩 치면서 - 레인이 건조해지고 회전이 살아날 때 이야긴데, 겨냥하는 스포트 오른쪽으로 두쪽 정도 옮겨 레인 컨디션에 적응하려 하지만, 아직 아귀힘도 없고 백스윙도 충분히 하지 못하기에 스피드보다는 회전에만 의존해 미스가 많다.(그러니 쨍하는 소리보다 퍽하는 소리만 나고...)
7번이나 10번핀만 남으면 좋겠는데 결과는, 기기괴괴 해석불가의 초대형 스플릿으로 남는 게 부지기수...
이것도 다 잘하기 위해 겪어야할 시련이라 생각하고 온갖 그림을 그리며 해괴망측한 스페어 처리에 도전하는 것도 볼링의 또다른 재미... 본래 내가 머릿속에서 그림은 잘 그린다.
1번 핀을 맞춰 2번 7번을 치고, 볼은 5번 8번을 밀고 나가고... 1번을 두껍게 맞힌 볼이 5번 핀을 얇게 맞춰 10번핀을 때리면서, 다시 살살 굴러간 볼이 나머지를?? 허걱~^^
치면서 하나하나 생각이 난다. 하나의 스포트를 지점으로 내가 한쪽 움직이면 볼은 세쪽만큼 차이가 나지?! 7번쪽을 처리하려면 오른쪽으로 세쪽을 움직이고, 10번핀을 처리하려면 왼쪽으로 세쪽을 움직이고... 문제는 그런 볼들이 지나가는 길에 볼링핀이 서 있지 않다는 점...^^
두껍다 얇다를 떠나 엉뚱하게 지나가는 볼을 보면 아직 정확하게 릴리스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다.
머릿속에서는 부지런히, 명쾌하게, 그리고 매우 정확하게 계산 되는데, 몸은 그렇게 따라주질 않는다.
3.
5월달인가? 15년만에 볼링공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해 맨처음 기록한 스코어가 108점이었다.
그나마 두자리 수는 면했지만 하필 108점일까? 골프 홀도 108mm고 불교에서도 108 번뇌를 말하는데... 아무튼 스코어 보드에는 / / X 표시보다 스페어를 처리하지 못해 미스 한 프레임이 더 많은 게 분명하다.
물론 두 번째는 120점대, 140점대... 이제는 150, 160점대까지 올라갔으니 나름 적응되기도 했다는 생각. 문제는 내가 기록했던 예전의 점수를 나는 다시 기록할 수 있는가? 나는 왜 점수에 연연해하는가 하는 문제다.
생각해보면 과거에 잘했던 일이나 친숙했던 것이, 지금도 익숙하거나 잘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듯, 예전만큼의 깊이와 관심과 정성을 똑 같이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럼에도 다시 회상하고, 즐기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미련 때문일까? 자만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짜릿했던 과거를 되새길 정도로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결국 나도 추억을 애무하며 살아가는 중년이 되었나?
우리는 가끔 몸 따로 맘 따로 놀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분명 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기억은 최선과 최악의 결과뿐임을 망각하는 경향도 많다.
그래서 골프를 치면서, 무언가를 하면서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을 때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이 “왜 이러지?” 아닐까? 그때는 잘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최고의 기량을 갖추었던 것처럼 이전의 자신은 완벽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걸 빨리 벗어나는 게 진정 내게 필요한 마인드 컨트롤이 아닐까?
내가 다시 2백 4~50점을 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 점수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볼링공을 다시 만지는 게 아니지 않는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볼링을 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나는 심심해서, 마음속 노폐물을 떨구고 싶어서 치는 거 뿐이잖아.
숙소 지하에 볼링장이 문을 열었고, 이제 몇 번 볼링을 치면서 늘 “다시”라는 개념에 묶여 있는 나를 관찰하고 있다. 15년간 묵혀 곰팡이 피고, 녹 쓴 손목 보호대를 물로 씻어내면서 과거와 연결시켜야만 이유와 목표를 설정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가 분명 다름에도 불구하고, 볼링이라는 게임을 매개로 나는 또다시 과거로 회귀하려는 간사한 마음, 창조적일 수 없는 내 머리를 읽고 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아직도 너그럽지 못하고 도전적이지 않는 내 마음을 느끼고 있다.
단지 자극에 반응하는 내 맘의 활력과 게임과 승부를 통해 다듬고 싶은 긴장과 조금이라도 생산적일 수 있는 여가를 위해 볼링이 필요할 뿐인데 말이다.
4.
재작년까지 골프연습장이, 새로 생긴 상가와 비어있던 지하실을 채웠었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소비패턴이 각박해졌는지 국민소득 1만불 시대에 유행한다는 볼링장이 내가 사는 건물의 지하에 들어섰고, 골프연습장에 몰렸던 많은 사람들을 비롯,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링장을 찾는 걸 본다. 외양은 2만불인데 마음은 1만불로 퇴보한 것일까?
그래도 아주 가까운 곳에 하나의 놀이시설 - 문화오락 시설이 생겼다는 데 괜시리 위안이 된다. 게다가 볼링은 혼자서도 맘 놓고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닌가? 약간의 두터운 얼굴과 만원짜리 한 장과 천원짜리 지폐 몇장만 들고 있다면 말이다.
볼링과 경기문제를 연결시키면서 이곳 영종도에서의 여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과거에 볼링을 쳤었다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된다. 부지기수로 퍼펙트를 기록했다는 황사장, 80년대 월급보다 많은 돈을 내기 볼링에서 땄다는 말까지 들으면서 스트라이크 8개에 만만했던 내 자신이 어색할 정도로...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과거를 가지고 살고 있으며, 그것이 또 하나의 매개가 되어 숨겨진 이면의 자신을 들춰내고 새로운 도전과 활력의 밑거름으로 삼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새로운 도전과 자극이 절실한 때이니까.
AMF, 브론스 윅... 아시안 게임에서는 정식 종목이 되었지만, 레인 재질과 통일되지 못한 협회 등의 문제로 올림픽 공식 종목이 되지 못한 볼링장이 간간히 생겨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경험과 수준이 되면 모든 게임은 자신과의 싸움이 되고 만다. 그것이 육체적 훈련의 견고함으로 드러나든, 정신적 컨트롤을 통한 안정감이 무기가 되든 결국 목표를 향한 投球(투구)의 일종인 볼링은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한정된 범위에서 정착할 거 같다.
창피함을 북돋아주는 동료들이 있고, 시원한 파열음에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다면 어느 스포츠인들 재미없겠는가. 언젠가 직원들 데리고 함께 왔을 때 조금 더 즐거울 수 있도록 가끔씩이나마 볼링을 쳐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볼링은 매우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같은 사람도 쉽게 칠 수 있을 것이고...^^
먼저 볼링은 던지는 게 아니라 굴리는 것이다. 또한 구르는 볼은 기름이 칠해진 레인을 타야 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목표로 설정된 10개의 핀을 볼링공이 모두 맞출 수 없기에 핀의 액션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그래서 더해지는 게 스핀과 스피드다.
결국 균형과 리듬은 자세와 연습의 문제고, 스핀과 스피드는 디테일한 기술과 힘, 즉 몸의 문제고,
마지막으로 레인에 대한 적응은 경험, 즉 몸과 마음의 일체성 여부다. 결국 몸과 맘의 컨트롤 싸움이지.
뭐 이렇게 정리한다면 나의 볼링 스코어는 300점이 돼야 한다.
그래~ 내 마음만은 늘 퍼펙트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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