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13. 세계 4대문명, 종교, 문명의 이동
- 앞 글의 배례석 12. (부록)에 해당하는 메모다... - 앞 글에서는 세계 4대 종교의 건축에 대해 간단히 살펴봤고... - 이 글에서는 세계 4대 종교의 교리적 완성과 포교의 체계화 및 - 세계 4대 종교의 창시와 변화/발전 과정과 문명의 충돌 및 문명간 교류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메모해 본다... - 이뿐만 아니라 종교의 교리적 완성과 포교의 체계화를 포함해 종교건축의 완성까지 불교가 인도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교리적 완성과 포교의 체계화는 세계 4대 종교(①기독교, ②이슬람교, ③힌두교, ④불교)의 성서와 성경에 대한 생각으로 대신하고(부록)... ... * 참고문헌은 중간중간 소개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고등학교 역사부도/금성출판사/2001년판을 많이 인용했다... |
세계 4대 종교의 성서/성경에 대한 몇가지 생각...
○ 각 종교의 경전이 집대성되거나 공인된 시점을 살펴보면,
① 기독교의 경우 구약성서는
- 유다왕국 멸망과 바빌론 유수(BC 597~538년)를 기점으로 1부 모세 5경인 <토라>를,
- 2부 예언서 <네비임>은 BC 2세기,
- 3부 성문서 등인 <케투빔>은 예루살렘 멸망시점인 70년경,
- 신약성서는 복음서/사도행전/예언서 등을 1세기경 집필하여, 397년 종교회의를 통해 공인하니, 구약/신약성서가 정경(正經)화 시점은 4세기말이 된다.
②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쿠란은 무함마드가 610년부터 23년간 가브리엘을 통해 받은 유일신 알라의 메시지를 집대성한 것으로, 651년 정본이 완성된 이후 수정되지 않는다.
<192-1, 성서/성경들... ① 우파니샤드, ② 백지묵서 묘법연화경/1377년/국보 211호, ③ 감지은니 대방광불화엄경/1337년/국보 215호, ④ 구약성경 목판본, ⑤ 신약성경 목판본, ⑥ 코란>
③ 힌두교 경전은 <슈루티/계시된 것>과 <스므리티/기억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 스므리티는 서사시부터 법전까지 세상 모든 것(!!!)을 담고 있으니 열외로 치고,
- 슈루티를 대표하는 것으로 <4종 베다>라 불리는 삼히타가 BC 1200 ~ BC 900년,
- <우파니샤드>는 BC 700 ~ BC 500년에 집성되고 9세기에 집대성된다.
④ 불교는 석가모니 가르침인 경장, 계율을 기록한 율장, 주석서인 논장으로 구분하는데
- BC 5세기 석가모니 열반 직후 제1결집 때 율과 법을 암송해 정리하기 시작해,
- 아소카왕대인 BC 244년 제3결집 때에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고,
- 5세기 대승경전이 마무리된다.
○ 몇가지만 생각난 걸 메모해보면 ;
① 세계 3대 종교하면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를 꼽지만, 인구수 기준으로 세계 4대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고, 이중 불교가 압도적으로(?) 적다(5억 정도).
②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 힌두교는 다신론, 불교는 무신론이다.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힌두교는 인류문명사 중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결정체쯤 되고, 고대 종교의 완결판은 이슬람교, 가장 근대적 종교시스템을 가진 것은 중근세에 종교개혁을 통해 변화한 기독교, 그리고 가장 느슨하게 역사를 이어온 불교가 고대종교시스템을 완성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192-2, 세계의 종교분포와 불교신도분포>
③ 경전은 신의 계시(기독교/이슬람교/힌두교)와 석가모니의 가르침(불교)을 문자화한 것이지만, 선지자들의 예언과 후대 제자들의 행적과 서사시 등이 추가되었다. 경전에 대한 절대적 신성을 따진다면 신의 계시를 아예 바꾼 적이 없는 코란이 먼저 떠오르고, 기독교와 힌두교는 긴 시간을 가지고 예언과 복음과 역사적 지식이 추가(교단, 즉 (감히) 인간들이 공인한 내용이 경전에 포함됐다는 말)된다.
다만 무신론인 불교만이 주석서인 논장까지 경전에 포함을 시켰다. 신의 계시가 아닌 인간들의 분석과 해석을... 그걸 경전으로 칭송하고 숭배하는 게 불교다.
④ 신약성서가 예수의 부활을 주제로 한 복음(신의 계시/심판과 부활을 이미 증명했다!)으로 출발한다면, 구약성서는 종교와 그 종교를 믿는 민족 혹은 국가의 해체 위기를 극복하고자 정립된다. 일제강점기 박은식의 한국통사, 원의 간섭기 일연이 쓴 삼국유사, 원말명초 화족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썼듯이... 때문에 구약성서는 보편적 인류와 신의 관계가 아닌, 신으로부터 선택된 유대인/유대민족의 (선택받았음에도 노예생활을 해야 하는) 역사이며, 신화고 예언이며 율법이다.
- 다만 구약성서는 바빌론 유수에서 겪은 외부의 충격을 열린마음으로 수렴한다. 보다 선진적인 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아케메네스의 문화를 본받고, 조로아스터교에서 신의 심판과 인간의 윤리에 대해 고찰하면서, 유목문화의 특성중 하나인 현세지향적이던 유대교를 보다 관념적으로 탈바꿈시킨다.
<192-3, ① 메소포타미아 문명(4000 ~ 600 BC), ② 신아시리아제국(934 ~ 609 BC), ③ 바빌로니아제국(626 ~539 BC), 이때 유다왕국이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한다 – 바빌론 유수>
- 그래서 기독교는 유대민족의 감정과 보편적 인류애 사이에 괴리가 발생할 수 있으며, 현세 지향적일 때와 종교적 내세를 강조할 때 편향이 생긴다. 솔로몬식 신정일치와 신과의 개인적인/인간적인 계약, 그 극단적 이중성에 늘 노출된다. 또 공간/영역을 구획하는 선에 집착하고, 그 양극단의 거리/괴리에 조건/인과란 필터를 끼워(그렇지 못하면 서 있을 수 없음!!!) 합리적 이성/과학으로 채우려는 노력을 느슨하게 두지 않았다
(예 ; 진화론에 대응하는 창조론... 신의 영역인 창조에 인간의 의지와 증명인 론(論)을 굳이 갖다 붙일 필요가 없음에도 창조론이라 이름 붙인다. 기독교와 이슬람에 내재된 불씨이기도...).
⑤ 기독교와 불교는 유일신과 무신론의 측면에서 양극단에 존재하지만, 계율을 관장하는 교단의 영향력이 절대적(신의 계시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인간들의 모임인 교단이 승인한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래서 이들 삶에는 신(또는 깨달음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분리될 수밖에 없고, 종교영역에서 통일/조화를 이뤄야 함을 인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슬람교와 힌두교는 종교영역이 존재하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단이 관리하는 계율이 무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신앙이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기독교와 불교쪽이 정신의 영역을 훨씬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현재와 육체의 버림과 채움에 대해서는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체념이 빠를지도 모르겠다.
<192-2,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과 4대 종교와 관련성을 생각하면 재밌을지 모르겠다... 힌두교인 인도는 98.8%. 이건 사후세계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사회구성체다... 그리고 이슬람교쪽이 90% 전후. 죽어도 사후세계가 있다면, 죽음도 삶의 연장일 수 있겠다... 이에반해 같은 이슬람이지만 역사문화가 다른 동남아의 비율은 50~80%대로 떨어진다. 사후세계를 믿는 것과 삶과 죽음에 대한 폭력성과 과감성이 일치하지 않겠지만, 드는 생각이 많다... 기독교쪽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쪽(60% 전후)이 카톨릭보다 인식률이 높고, 카톨릭도 유럽(40% 전후)보다 남아메리카(60% 전후)가 더 높다. 합리성과 일관성은 전혀 별개로 작용하는 거 같다... 상대적/절대적으로 인식률이 낮은 곳은 동북아다. 불교의 영향일까? 특히 도교/유교적 영향이 강한 중국은 11%대로 압도적으로 낮다. 인식률이 죽음/별리의 슬픔과 삶의 허무에 대한 강도를 결정하지 않겠지만 유의미한 차별성이다... 종교관과 역사문화가 선악과 시비, 삶/죽음에 직/간접적이거나 결정적 혹은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편차가 크다는 것은 분명하다...>
⑥ 힌두교 경전은 모든것이 다 있지만,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경험하고 상상하고 문자화시킬 모든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신과 신격, 영웅과 인간의 이야기이며, 그래서 역사와 신화와 서사시가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완성태라 생각한다. 또 역으로 철저히 현실적이다. 법률과 의학, 천문지리와 건축, 음악과 군사학과 시와 성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
빠뜨리지 않는 공통의 맥은 인더스 문명이 남긴 요가수행, 브라만교가 남긴 제사규범, 그리고 인도아대륙의 역사가 남긴 사변적 철학이다. 또 힌두교의 신들이 화신을 거느리듯, 힌두교인들은 자신의 상황에 맞는 신의 아바타를 소환한다. 그래서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 그리스신전과 불전에서는 1대1 대국이, 힌두교사원에서는 1대 다수의 다면기만 존재할 거 같다.
<192-4, 힌두교 사원... ① 카주라호 시바신전, ② 약사르담 힌두사원>
⑦ 경/률/장... 불교의 경전은 결국 시작과 끝이 없다.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철학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종교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거 같다. 또 그래서 불교의 경전은 대승/상좌부/금강승·밀교에서 하나의 잣대로 비교-분석되지 않는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경전을 고르라면 그 기준은 ‘시대’일지 모르겠다. 또 또 그래서 불교경전에서 검색순위 1위는 시대와 개인의 이해와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화엄경, 금강경/반야경, 묘법연화경, 아미타경/무량수경, 천수경, 미륵**경, 법구경, 능엄경, 유마경 등). 우주란 무대를 배경으로 무한한 시간 속의 윤회를 거세하면, 지식을 갈구하는 철학(인식론... 그래서 불교에서 정화운동을 이야기하면 그 골자는 항상 ‘실천론’이 된다)이 된다. 인과률과 연기론을 넣고빼다보면 다신론인 그리스 철학과 궤를 닮을 수 있다.
유목문명과 중동제국들...
⑧ 4대 종교와 4대 성인이 있다(4대 문명도!). 기독교의 예수와 불교의 석가모니에, 이슬람의 무함마드가 빠지고 유학의 공자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가 들어간다. 평행이론이라 하나? 4대 성인 중 예수를 빼면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6세기경 동시대 인물이다.
<192-5, 축의 시대>
동서양이란 지리적/인문적 조건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런 이유로 기원전 500년대를 전후(±300년)해 <축의 시대/기축시대의 문명/Axial-Age Civilization/위대한 시대>라 부르며, 석가모니(불교)와 공자(유교/유학), 노자(도교), 소크라테스 외에 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아시리아/바빌로니아/아케메네스 왕조)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조로아스터교까지 인류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철학/종교가 탄생했다.
<192-5, 인도유럽어족의 진출과 확산은 청동기 암나야문명과 연결해 생각해 볼 시사점이 많다...>
- 이 시점을 기준으로 시기를 조금 당기면, 기원전 13세기 모세가 요단강을 건넌 출애굽기(모세5경)가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들어와 리그베다를 완성한 때와 비슷하고,
조금 더 후대인 기원전 3~2세기 불교의 3차결집과, 구약성서 2부 집성, 그리고 유학이 정립된 시기도 비슷하다(한반도는 고조선 멸망).
그리고 다시 신약성서가 정경화 되고 대승불교가 논장을 갖춘 4~5세기, 동서로마가 분열하고, 중동은 사산왕조가, 인도는 쿠샨왕조에서 굽타왕조로, 중국은 위진이 무너지고 남북조시대가 열린다(한반도는 고구려-백제 남진).
<192-6, 기원전 2세기 흉노의 이동>
<192-7, 기원전 1세기 스키타이족>
<192-8, 2~3세기 선비족>
- 이 시기들에서 내가 찾은 공통점은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근거를 둔 유목민의 이동이다. 또 풍선효과라 하나? 이 벨트에서 한 유목민족의 이동은 인근 유목민족의 이동을 촉발하면서 나비효과 같은 결과로 귀결되기도 했다. 근거지는 같고 부족들이 달랐을 뿐이다.
기원전 아리아인(1500~500 BC)과 스키타이인들의 이동, 기원후 스키타이인과 흉노(훈족), 돌궐(튀르크)의 이동, 그리고 1000년대 들어와 거란족과 몽골족의 영향까지 고려하면, 유목민족의 대대적 이동은 항상 세계사를 뒤바꿨다.
어찌보면 문명(문화/Civilization/Culture)사 자체가 정착/도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유목민의 이동은 그 자체로 외부로부터의 충격일 수밖에 없고, 이때 역사는 요동쳤다. 그리고 이들이 매개체가 되어 4대문명은 상호교류하면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4대 문명의 발상지는 오히려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2-28, 유라시아 스텝지역, 이 지도와 암나야 문명의 전파, 아리아인의 진출, 인도유럽어족의 진출, 초원의 길, 유목민들의 등장을 하나로 묶어볼 수 있다...>
- 또 이런 교류와 충돌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침탈이 가능한 풍부한 노동력과 자산, 그리고 문화가 있었다. 한마디로 먹을 게 많았다는 소리...
게다가 유목민의 이동이 가능할 수 있는 침략대상은 제국(상업과 무역을 비롯해 정보의 교류가 가능한, 풍부한 자본과 노동력이 동원될 수 있는, 그리고 전쟁이 가능한, 즉 침탈자들이 욕심낼 만한 높은 경제적 잉여와 문화적 성숙이 갖춰진 국가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제국/제국의 시스템을 장악할 수 있는 무력만 있다면 그들이 의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교류하고 문화는 전파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역으로 외부의 침탈이 지속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형성은 더욱 촉발됐을지도 모른다. 선순환인지 악순환인지, 외부의 침략이 양질적으로 다양하고, 한방향/한세력만의 제어로 국경이 방어 되지 않는 곳에서 소위 <제국>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192-9, 3~4세기... 이 한 장의 지도를 보면 당대 세계의 변화가 추적된다... 유연/선비/흉노의 이동에서 시작된 변화... 동쪽에서부터 한반도는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백제가 요동치고, 왜/일본에 문명이 전해지고... 중국은 한나라가 멸망하여 삼국시대가 시작되고... 인도는 쿠샨왕조에 이어 굽타왕조가 들어서고... 페르시아는 사산왕조가... 로마는 동서로마로 분리되고, 다시 서로마가 멸망하고... 유목민이 이동을 시작한 1~200년 사이, 세계는 격변했다...>
- 중근세 이전, 아직 몽골의 역참제도가 인류의 시스템으로 정착하기 이전, 이런 조건에 직접 노출되기 쉬운 곳이 메소포타미아와 중국이었고, 특히 교역의 중심지면서 여러 문화가 이합집산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춘 곳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2대문명이 충돌하는 지점(나는 그 이유가 지정학적 특징이라 생각한다. 반농/반유목 문화일 수밖에 없는 자연환경에, 해양문명까지 교류가 빈번해 변화의 주기가 무척 짧고, 그만큼 빠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중국과 인도는 유목문명과 충돌해도 이를 흡수하여 변질시키기에 충분한 농업/정착문화를 갖췄다고 볼 수 있다)이 유목민의 잦은 출현과 세력교체는 물론 제국의 명멸이 가장 극심했다고 생각된다.
<192-10, ① 아케메네스 왕조 (550~330 기원전)와 ②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제국... 먼저 문명의 충돌은 앗시리아제국에서 출발하고, 다음 아케메네스 왕조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중심으로 이집트문명과 인더스문명이 교류/충돌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알렉산드로스제국은 그리스문명을 섞는다... 최초로 해양문명의 제국이 농업정착문명과 유목문명의 힘을 압도한 시대인 것이다... 양 제국의 영역이 비슷하다...>
- 역사적으로도 이 지역은 국경이 불분명한 형태에서 수많은 왕조와 세계적 제국들이 명멸을 거듭해왔다. 2대 문명을 동시에 포괄할 규모의 제국으로 ; 아시리아 및 아케메네스(BC6~BC4세기), 알렉산드로스(BC4세기), 로마(BC1~AD5세기, 동로마 4~15세기), 이란 사산왕조(3~7세기), 칼리파 이슬람제국(7~12세기)과 셀주크(13세기)까지 생각할 수 있고,
<192-11, ③ 로마제국(기원전 218 ~ 기원후 117년). 동서로마 분열(395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동로마제국(555년경)>
<192-12, 192-9 지도의 서쪽 확대도쯤 되겠다... 흉노의 이동이 훈족으로 이름붙여지고, 그들은 울가강을 건너고, 도나우강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한다... 150년대부터 시작한 훈족의 이동으로 로마제국이 분열하고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한다...>
<192-13, 돌궐/튀르크족의 이동... 로마제국이 요동칠 때 중국에서 격변이 일어나듯, 유목민의 이동은 항상 동서양에 동시에 영향을 미쳤다. 소위 5호16국과 남북조시대의 배경에는 유목민의 남하가 있었다... 이로써 중국의 양자강 이남은 해남도와 베트남 북부까지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 4대 종교가 온전하게 정착한 다음 유목민으로 전세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몽골제국 이후, 유목문명은 초원의길/사막의길이 바닷길의 교역규모에 추월당하면서 영향력을 서서히 상실하게 되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수로개척부터 완전히 분열-제국에 흡수된 이후 오스만제국(13~20세기)으로 연명했다.
중근세까지 오랜 세월 유목-해양-농경 문명이 충돌했던 이 지역은, 석유와 가스란 에너지자원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만, 여전히 ‘화약고 중동’과 ‘중앙아시아’란 이름으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192-14, ④ 사산조 페르시아와 ⑤ 이슬람제국>
<192-15, 칼리파 이슬람제국>
<192-16,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의 진출>
<192-17, ⑥ 셀주크 제국(1040~1157년)과 ⑦ 몽골제국(1219~1500년)>
<192-18, 시베리아 수로개척(1619년)>
- 참고로 4대 종교가 정경화를 이룬 다음(7세기)에는 제국주의시대와 세계대전 이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계기를 고른다면 몽골제국의 등장이고, 그 외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제국의 역할을 체크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교 등장 이후인 751년 당나라와 칼라파 이슬람제국 간의 탈라스 전투를 통해 <종이>가 서양 및 남양(인도)에 전파되고, 이를 통해 중국문명 외 지역에도 성경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물론 수백년이 걸렸지만, 구전에서 문자화, 특정 소수의 전유물에서 교단의 공유물로, 또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된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2-19, ① 탈라스 전투와 종이의 전파, ② 751년 전후 중국/당나라와 주변국의 변화>
○ 문명의 축이동 ; 농경 → 유목 → 해양
*1.
몽골제국의 등장과 쇠퇴는 중근세 인류사의 가장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역사시대 이후 최초로 세계 4대문명이 하나의 제국으로 탄생하고 다시 분열된 일이니까(물론 이집트 문명을 유럽과 중동이 계승했다는 점을 전제로...). 중국과 인도문명이 약간 고인물의 성격이 없지 않지만, 이전까지 인류의 무기와 부와 지식은 중동에 모였고, 중동을 통해 전파되었다(유럽의 중세 암흑기에 대비되는 중동의 황금기). 그리고 유목문화가 농경문화를 압도한 완결판이 몽골제국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세계는 변한다.
<192-20, 몽골제국>
**2.
2-1. 해양문명이 농경과 유목문명을 주도하게 된다. 15세기 대항해시대의 시작이다.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함께 세계의 시장으로 편입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초원의 길과 사막을 길을 통한 물동량을 초과한 이후, 16~17세기부터 급속히 확대된 노예무역에 기반한 사탕수수와 농작물, 면화 등은 육로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대형선박과 대양무역을 통해 무게중심의 이동은 가속된다.
2-2. 그리고 그 기반은 중국의 4대발명품으로 <종이> 외에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 3개를 따로 묶어 르네상스 3대 발명품이라 한다)>의 결과다. 유목민이 장악한 실크로드로 피하기 위한 서양의 노력은 대항해시대로 꽃을 피웠고, 왕/국가의 성립에서 관료/중앙집권제도의 유무가 고대문명 존속의 성패를 좌우했다면, 대항해시대부터 <절대왕정>과 <자본축적>은 새로운 <중세/또는 중근세>시대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192-21, ① 고대 초원길 / 사막길 / 바닷길과 ② 중근세 신항로의 개척... 고대와 중근세 바닷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안무역과 대양무역이다... 인구증가와 과학기술의 발전만큼 물류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초원의 길에서 필요한 기동성에서, 바닷길에서 필요한 물량공세로 관심의 축도 바뀌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2-3. 또 최근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 명명하며 그 의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대항해시대에 대량유통이 가능해진 도자기무역이 근세계사에서 미친 영향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막대했다.
비단과 향료 다음으로 부상한 중국 도자기를 사기 위해 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고, 중국에서 도자기 수출을 금지하면서 일본이 국제교역시장에 등장하고, 중국의 은을 빼내기 위해 인도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아편을 생산해 밀무역을 시작하고, 결국 아편전쟁으로 비화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면화 등을 비롯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재편까지 귀결 되고...
비단 도자기는 경제문화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인류문명의 출발이라 할 불의 정점에 화약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도자기, 도자기로 인류의 수명과 건강이 변화하고, 철기시대에 금속과 비금속, 준금속의 소결/소성기술의 발전은 우주진출의 초석이 될 정도로 도자기/세라믹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192-22, 대항해시대 도자기 교역로>
***3.
3-1.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연 해양문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간의 전쟁과 무역속에서 성장한 그리스의 <미노스/미케네 문명>에서 출발해, <에게문명(3650~1100 BC)>으로 꽃피우고,
<192-23, 해양문명의 등장... ①미노스/미케네 문명, ② 에게해문명, ③ 도리아인의 진출과 청동기시대의 붕괴... 여기에서 Sea people은 정체 불명의 유목민이라 생각하고 있다... 참고로 이 시점이 인도유럽어족/아리아인의 인도방향 1차 진출 이후 시점이다...>
3-2. 인더스문명까지 수렴한 알렉산드로스 제국(BC 4세기)에서 헬레니즘문화를 만든다.
<192-5, 헬레니즘왕국(기원전 323 ~ 기원전 146년)... 고대 인류역사에서 유일하게 해양문명이 세계 4대(농업정착) 문명을 압도하고, 유목문명을 동쪽으로 이동시킨 사례다... 대략 100년 후 인도에서는 아소카왕이,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등장하여 인도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이 탄생하게 되고, 다시 100여년 후 고조선이 멸망한다...>
3-3. 그리고 로마제국의 성쇠와 기독교/이슬람교의 정착 이후 등장한 <바이킹(8~11세기)>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바이킹의 유목민족의 말과 수레에 비견되는 장기간 이동이 가능한(마른명태가 큰 역할을 했다고...)
<192-24, 바이킹 영토(789~1066년)와 바이킹 시대(911년)... 유목민만큼 서양에 강한 충격을 준 것이 바이킹 해양민족이다... 유목민에게 말의 기동성이 있듯이, 바이킹은 뛰어난 조선기술과 함께 장기간 이동(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지중해까지 한번에 이동할 수 있는)이 가능한 식량, 즉 명태가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북아메리카(캐나다쪽)를 처음 발견한 것도 바이킹이었으며, 그들은 명태떼를 쫓아갔다는 학설도 있다...>
3-4. 기동성과 항해술에, 중국 4대 발명을 개선한 르네상스 3대 발명이라 평가되는 화약/대포(장거리)과 나침반으로 무장한 대양 항해가 가능한 선박제조 기술을 갖춘 15세기 서양/유럽은 인류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192-25, ① 지중해 연안(제노바와 베네치아, 1419~1507년)과 ② 대항해시대 스페인과 포르투갈(1522년)...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주도하는 지중해 연안무역의 활성화를 통해 부와 무력이 축적되고,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대양무역을 통해 부와 무력이 축적된다... 그 힘은 선박에 대포를 탑재한 것... 1500년대 후반을 주도했던 것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고, 1588년 잉글랜드-스페인 전쟁 중 칼레해전에서 무적함대는 참패한다... 물론 해전에서는 무적함대의 피해는 5척에 불과했으나, 태풍에 휘말려 전멸한 것... 이때가 임진왜란 시기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때 영국해군을 이끌던 드레이크 제독/해적출신과 이순신장군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가상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연안에서는 이순신의 거북선이, 대양에서는 드레이크 해군이 이겼을 거라는...^^ 참고로 배에 대포를 처음 탑재한 것은 고려의 최무선 장군이고, 거북선이 일본함대를 이긴 것은 함포의 사정거리가 길고, 1척에 탑재한 함포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거북선이 무거운데다 방향전환이 빨랐기 때문이라고...>
3-5. 또 인쇄술로 확산된 종교개혁과 그리스-로마의 인본주의를 부활시킨 르네상스, 자본과 시장 그리고 절대왕정으로 무장한 서양의 대항해는, 그 이전까지 인류사의 젖줄인 초원의 길을 대체하고, 19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지시대를 연다.
<192-26, 1차 세계대전 이전 19~20세기초 제국주의 시대>
****4.
4-1. 황하/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나일강/인더스강에서 시작한 4대문명(수렵에서 농경, 선사에서 역사시대, 청동기, 중앙집권국가와 법령, 기원전 1500~1100년 이전),
<192-27, 세계 4대문명 및 산맥과 사막... 강제명 국제정치학 참조... 지정학적 측면에서 문명의 충돌과 이동을 생각하면 바닷길과 하늘길이 열리기 이전의 세계가 한눈에 들어올 수도 있겠다... 산맥으로 막히고, 사막으로 차단 되고... 이때 인류의 문명이 이동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 초원의 길이었다...>
<192-28, 유라시아 스텝지역>
4-2. 흑해와 카스피해, 아랄해 그리고 바이칼호에 이르는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존재했던 유목민의 진출(농경과 유목문화 충돌, 청동기에서 철기, 기병과 전차, 무역과 전쟁, 신과 노예, 철학과 종교, 천문-의학-수학-과학, 1500년 이전)
<192-29, 유라시아 스텝지역 유목민... 때문에 이들의 존재는 침략자/침탈자란 부정적 인식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크다... 문명의 전달자/전파자, 그리고 개척자였다는 생각이 갈수록 커진다... 튀르크/돌궐족이 주로 활동하던 기원전 4세기 ~ 기원후 7세기까지의 지도에 인도유럽어족에서부터 몽골제국까지의 활동범위를 표현해봤다...>
<192-30, 이슬람... 그리고 중근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슬람의 범위를 다시 한번 추적해 보고...>
4-3.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 등이 개척한 대항해시대 바다의 길(1차대전은 참호전이었다. 대표적 무기는 탱크/바퀴, 대포/화약, 전투기와 잠수함/엔진. 2차대전은 총력전이며 대량학살의 시대다. 대표적으로 생화학무기가 전면에 등장하고, 전투기와 미사일, 그리고 이들을 갖춘 항공모함이었다. 현대 무력의 척도는 핵무기 등을 탑재한 항공모함이다).
<192-31, 제2차 대전 후 냉전체제... 어쩌면 현대는 대항해시대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4-4. 그 다음을 여는 <길>은 무엇일까?
<192-32, 세계지도>
****5.
하늘길 – 비행기는 육로와 해로의 보조적 역할이고, 우주의 길 역시 기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전자통신/네트워크가 아닐까 싶다. 다만 전자통신/네트워크는 (앞서 내가 지적한 3가지 요소 중) 자본과 지식은 집적되지만, 무력은 물리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지식을 법으로, 자본은 세금으로 연계시키고, 무력을 파괴력이라 정의한다면 혹시 통제/관리되지 않은 AI가 전자통신/네트워크의 무력이 아닐까?
전자통신/네트워크의 4가지 요소인 모터(엔진)/반도체/배터리/인공위성 중 3개의 생산기술에서 세계 최고를 다투는 대한민국... 아무튼 공간/시간/깊이의 밀도를 높이는 시대, 4번째 길을 여는 문화/문명이 새로운 인류사를 써내려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192-33, 지정학적으로 바라본 4대문명, 유목문명, 연안-해양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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