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야 산
아쉬운 시간에 쫓겨 길을 나서야 한다.
이제 영암사지로 가야한다.
근데... 대부분의 폐사지가 정확한 지도가 없으면 찾기 힘든데...
고민~~~
그래! 해인사 책방에서 답사여행의 길잡이를 보면 되겠지? ㅋ ㅋ
그리고 예까지 왔는데 가야산의 소나무를 보지 않으면 섭섭하다 할거고...
언젠가 해인사를 왔을 때 가야산의 소나무들에 반했었다.
야... 이런 길을 이렇게 차로 가야만 하나?
시간을 만들어 걸어가야 할 길을...
<너무 좋아하는데 마땅한 사진은 없다... 걸어야할 길이다...>
가야산은 3신산 5악, 그리고 8경 8승에는 들지 않지만
이중환이 꼽은 12명산중 하나다.
너무나 인간적이 되어버린 5악에 비할 바는 아니나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하처럼 가야산은
높이의 잣대로 가늠되지 않는 옹골찬 근육미와 치열한 밀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은 소나무 하나하나는
여느 교향곡으로도 연주되지 않은 힘을 자랑한다.
<많은 의미가 붙었겠지만 너무 크다... 눈에 거스릴 정도로...>
올라가는 길 길상암 이정표에 엄청난 석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괜찮은가?
저기에 자리 잡아야 할 이유가 있나?
우연찮게 반은 억지로 해인사 앞까지 차가 올라간다.
탐방객들에겐 죄송하지만 시간관계상...
열심히 책방을 뒤지는데 하필 영암사지 관련 책자가 없다.
허허...
어떡하지?
10. 가야산 해인사
해인사까지 왔는데 장격각을 보지 않으면 그것도 ?
대적광전 앞에 석탑과 석등이 자리 잡고 있다.
간주석이 너무 몽땅해진 석등...
급격히 줄어든 몸돌로 인해 긴장감을 잃어버린 석탑...
근데 석탑과 석등의 자리가 대적광적의 중심선에서 비켜있다면
상당히 치밀한 공간경영과 동선의 유도가 따랐던 절임에 틀림없다.
작지 않은 석탑임에도 대적광전의 위세에 눌려
제 맛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네 절집의 석탑의 크기는 전체공간에서 규정된다.
대개 절집의 중심공간은 대웅전등이 자리 잡은 안마당(?)이다.
안마당까지의 진입에는 직선축, 병렬축, 꺽인축등 여러 형태가 있지만
모두 주변환경을 거스리지 않으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유도된다.
안마당까지 누각 아래로 진입하든(부석사처럼)
전각 사이로 진입하든(화엄사처럼)
안마당의 크기에 비례해서 대웅전등의 중심건물이 자리를 잡고
건물의 용마루는 석탑의 상륜부를 넘지 않는 규격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매우 규격화된 비례와 치밀한 시선과 동선의 유도,
그리고 독립적이고 실용적인 기능들이 총체적인 조화 속에서
전각들과 상징물들로 배치된다.
<지리산 화엄사 ; 꽤 오래된 흑백사진... 물론 각황전을 기준으로 하면 해인사와 다를바 없다.
하지만 화엄사의 중심축은 동서탑 정면의 대웅전을 기준으로 설정된다... 계단의 넓이도...>
말이 길어졌지만 한마디로
최근에 지어졌을 대적광전 용마루는 삼층석탑의 상륜부보다 높다.
때문에 안마당의 편안함이 사라지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깨뜨려졌다.
탑이 왜소해지고(6m면 작은 탑이 아닌데) 주변전각들과의 연관성이 흐트러졌다.
변화에 통일성이 없고
조화에 집중성이 없어지면 전체공간의 생기가 떨어진다.
역으로 대적광전 기단부에서의 조망도 시원하지 않는데
구광루도 초기보다는 분명 커졌으리라 생각된다.
부처님이 조금 답답해하지 않을까?
<물론 사진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게다가 역광이어서... 아무튼 답답한 구조...>
대장경판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인사가 해인사다운 이유는
팔만대장경과 대장경판전 때문이다.
우진각 지붕과 맛배지붕으로 엄정하면서 경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진각 지붕은 몽땅한(?) 느낌을 주지만
오히려 내부공간의 답답함을 터주는 역할로 비춰진다.
아마도 이 건물을 일본건축가들이 만들었다면?
하나의 건물과 커다란 지붕에
(아마도 우진각이나 맛배지붕으로) 수많은 실을 두어서 만들었을 것이고,
중국건축가들은?
규모 있는 볼륨감에 수많은 변화가 있는 지붕의
(아마도 팔작지붕을 택하지 않았을까?) 건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한국고건축의 특징 중 하나는
필요한 기능의 실을
딱 그만한 크기로 만든다는데 있다.
그래서 대장경판전도 하나의 건물이 아닌 4개동으로 쪼개서
적당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대장경판전... 아무리 칭찬해도 과함이 없는 건물...
한마디?!
절제미의 최고?!
팔만대장경과 인쇄술
팔만매가 넘는 경판과 5,200만자가 넘는 글자
대각국사 의천이 시작한 일을 약 150여년이 지난 1251년 낙성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판이며,
가장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뛰어난 판각기술과 보관기술(?)이 검증된 팔만대장경...
근데 내게 팔만대장경은 늘 인쇄술과 연관되어 생각된다.
인쇄된 글자의 마력은, 객관적 진리처럼 특유의 공인능력을 가진다.
활자화된 글자는 인간들을 자의성의 굴레에서 해방시킨
가장 강력한 무기중 하나가 된다.
(글자 속에 남아있는 자의성은 필체뿐이다)
때문에 글자의 모임인 책은 세상을 바꾼 가장 위대한 발명중 하나가 되었다.
책을 만드는 게 인쇄술이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서양문명 발전에 결정적 계기로 평가되며
또 이 활자가 있어서 루터의 종교개혁도 파급력을 갖게된 것이다.
<자세히 보면 앞쪽과 뒤면의 창구조와 크기, 높낮이가 다르다... 바람의 흐름을 고려한 배치...>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의 윤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정신에 미친 영향력은 정말 지대하다.
루터주의자들로 종교와 국가가 (다시)결혼했다면,
칼뱅주의자들로 인해 종교와 화폐가 혼인을 했으니,
사실 자본주의 정신의 산파는 칼뱅주의의 영향이 더 크다.
한반도의 인쇄기술과 능력은 유럽보다 훨씬 앞선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230여년 앞서
고려시대에 이미 금속활자로 인쇄 되었된 책들이 있었던 기록이 있다.
또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보다 정확하게 78년이 앞선 1377년에 인쇄되었다.
목판 인쇄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세계최초로 공인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 770년 인쇄되었다면,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주정광다라니경은 751년에 인쇄되었다.
<해인사에 있는 성철스님 부도 ; 부도를 생각할지, 인물을 생각할지...^^ 다른게 좋다...!!!>
한가지 더 고려해야할 문제가 있다.
인쇄의 내용이다?
신교의 주장과 행태는 불교의 선종과 얼마 차이가 없다.
공동체의 법은 성서에 있다는 칼뱅의 주장보다도,
(그런 이유에서 인쇄된 성서는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했고
더욱 절대적으로 많은 양의 성서가 필요했겠지만)
더 급진적인 게 선종의 가르침이다.
왜? 성서(불경)가 없어도 깨달음이 있고,
참되고 진실 된 마음만으로도 부처님의 마음에 다다르니...
이게 바로 직지심경의 가르침 아닌가?
기술이 앞서있고, 체계도 비슷한데
왜 이땅의 문화는 인쇄-교류와 소통을 의미한다면-와 정반대로 고립되었을까?
가루로 빻아야만 음식이 되는 밀 때문에
동력을 발명해야만 했던 유럽...
종이의 질이 너무 떨어져서
인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금속활자를 만들고 프레스를 만들어야만 했던 유럽...
전화위복?
한반도나 동양은 너무나 좋은 조건 때문에 오히려 발전이 더뎠나?
절대량 불변의 법칙(?)처럼 초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나?
<건축적으로도 이곳 저것 볼만한게 많다...>
물론 다른 점들도 열거할 수는 있지만 한마디로
한반도의 인쇄술이 지구사회에 미친 영향은 너무 미비하다?!
세계최초와 최고를 주장만 하기에 우리들이 한일이 너무 없다.
우리는 인쇄술의 의도를 져버리고 폐쇄성과 유일성에 너무 집착했다.
특히 조선의 정책과 유교는 더더욱 이런 경향을 강조했고...
사실 유교만큼 기독교와 유사한 종교 혹은 사상체계도 없다.
단지 내세의 있고 없음이 다를뿐...
그런데도 왜 성리학과 유교가 유일성에 집착하고 폐쇄적이 되었지?
이이와 이황의 차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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