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철이형의 10주기를 추모하며... 2007 01 23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20일...
밀린 결재와 비운 현장이 궁금함에도
발걸음은 한산으로 향한다...
선배의 기일, 오늘도 미룰 수는 없다...
서천, 군산, 금강하구언... 지명도 있는 표식들보다
늘상 우리는 한산으로 명칭을 통일했다.
첫 기억, 한산모시관에서의 잠시의 휴식이
10년을 규정하며 오늘에 이른다.
벌써 모이기 시작한 많은 동료들을 기다리게 하며
늦게서야 출발한다.
마음이 바쁘면 발걸음은 항상 더딘 법...
경부고속도로가 유난히 밀린다...
차분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선배를 회상하며
지난 일들을 추억하고자 했던 혼자만의 시간은
밀린 차들에 묻혀 조급함으로 바뀌고
가속되는 페달에 온 신경을 쏟아 붇는다...
아픔과 불행과 고통에 대한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이유 있는 방어기제를 만든다.
엄밀히 아픔보다는 회피와 현실에 대한 유보가
시리고 아련한 마음을 일부러 비껴가는지도 모르고...
형과의 인연은 오래됐지만
계량화된 수치가 절대적으로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지 마음에 담은 무게는
깊은 응어리에 남아 늘 한편의 무거운 추로 작용하지만...
83년 대학에서 마당극이 있었고
십자가를 끌며 백양로를 끌려가던 선배의 메타포는
종교의 옷을 입고, 현실과 정치적 기제들에 범벅되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 되었다.
몇 차례의 농민활동과 단편적인 공장지역 방문...
그리고 85년 신림동 낙골교회에서 빈민지역 활동을 하면서
많은 교감과 대화와 삶들이,
웃음으로 결의로, 그리고 지표로 좁지 않은 연들을 묶어 주었다...
삐꺽거리는 대학생활을 군 입대로 정리를 하고
다시 형과 같이 한 게 88년...
참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이
시위를 떠난 화살보다 빠르게 빠르게 이어지고...
91년... 잠시의 유보와 채움? 혹은 비움을 위해 떠났다...
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의 존재와 자취는
씨가 되기도 하고, 혹은 이미 사라진 연기가 되기도 한다.
그 잉태된 씨가 얼마만한 영향력으로 남아
다른 이들의 삶에 깊이 있게 다가갔는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수백, 수천, 수만의 사람들과 부대끼던
혹은 단지 몇 명의 사람들과 공유했던 눈물과 땀이라도
내게도 그들에게도 그리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흔적인 모양이다.
좁혀지고 폐쇄된 그래서 고립되어 남겨진 이름이 없다 해도 말이다...
형과의 짧지 않은 인연은 이런저런 기억들로 남았고
형의 죽음을 앞두면서
미뤄지고 미뤄지던 짧은 글들이 쌓여갔다...
병원에서, 영안실에서,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행불행을 넘어서 그런 낙서마저 소중한 단서들이 된다.
한사람을 기억하고, 한사람을 추억하며,
한 사람을 거론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도 아니며
또한 나의 형태와 어울리지 않는지 몰라도
이제는 조그마한 변화를 위해 열어보고 싶다...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는 과거에는 꿈이 없고
현재를 제약하지 못하는 과거에는 생동감이 없다.
그러나 과거를 과거로만 규정하기에는 소중한 것들이 많고
과거를 묻어두고 잊어버리기에 빈자리가 너무 크다...
뚜렷한 목적 없이 재생되고 회생되는 많은 것들 속에
유독 과거의 흔적과 자취에 연연 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나와 공유할 수 있었던 젊음과 꿈은 여전히 소중한 법...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함께 웃을 수 있는 어떤 기도를 만들어 본다...
느즈막이 도착한 산소...
마을 어르신 몇 분이 아직 추모회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 주시고
바쁜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흩어진지 몇 년 후, 형의 투병생활 이야기에
<아기참새 찌꾸>란 책을 들고
세브란스 병원을 찾았었다...
96년 7월... 그 때 썼던 일기 중 일부다...
<1996 07 22>
... ...
당장에 가야하는데도 갖가지의 핑계와 이유가 나를 붙잡아 놓는다.
사실 어떻게 울 것인가 며칠을 생각했지만,
무엇을 대답할 것인가 며칠을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고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나 [삶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고이던 눈물이 정작 병원에 가까이 가서는
별다른 생각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병원 앞에 다다라서는 병실 문 앞에 다가와서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저 먼 철길을 바라보면서
자꾸 자꾸 뭔가를 생각하였다.
정말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절절하고
꺼내기 힘든 게 나의 한순간 한순간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너무나 가볍고 작은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나의 경험과 과거에 대해 후회하지 않지만
무조건 칭찬받고 인정받아야할 화려한 추억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나의 경험들이 수단이 되고 무기가 되기에는
아직까지 나의 수준과 힘이 미약함을 알고 있다.
... ...
형은 나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가족, 딸, 그리고 그의 많은 동료들,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무엇을 바랄까?
나는 형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그렇게 말하면 될까? ... ...
나에게 이 구절이 이렇게 절박하고 사무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아니 이 노래의 몇 구절에 대한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말 중에서
지금의 나에게 이처럼 사무치는 감정을 복받치게 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감정은 얼마동안 나의 가슴에 머무를 것이다.
... ...
나는 형을 봤다.
둘이서 손을 잡고서 둘이서 그냥 만지작 만지작 거렸다.
글세 내가 할 수 있는 표현은 이게 전부였다.
아니 그것 외에 별로 할 게 없었다.
형이 먼저 지난 시간들을 더듬었다.
아주 짧게, 과거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야라는 ‘모범’을 보이듯이 말이다.
변하지 않은 형의 특기와 장점도 살아있고,
여전히 내가 불만족스러워하는 부분도 있었다.
변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그게 좋다.
여전히 그 모습이니까.
‘지독한 놈’ 형은 나를 그렇게 단정 지었고
그 날의 회상은 그렇게 끝났다...
... ...
나는 우리들의 대화 속에서 또 하나의 삶을 보고 있었고,
그 삶은 막연한 감상도 무조건적인 미화도,
또한 무미건조한 경험도 아닌 우리들의 삶 그대로였다.
그래? 우리들의 삶이 이런 건가?
실망도 찬양도 하기 힘든 현실의 삶은 그렇게 나를 붙들고 있었다.
... ...
죽음을 조금 더 가까이 느껴야함을 강요받고
삶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직접 봐야했고 또는 간접적으로 들어야 했던
나의 가깝고 먼 관계 속에서 죽음은,
때로는 단절로,
때로는 변화로,
그리고 때로는 충격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생각해야할 죽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 ...
나는 형이 꼭 치유되어야 한다고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간절하게 기원하지도 못했다.
얼굴을 마주하는 그때를 웃음과 회상으로 채색하지도 못했으며,
나의 지금과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특별한 이야기를 던져보기도 않고 나왔다.
그렇다고 울지도 웃지도 않고...
... ...
병원을 나오면서 나에게 마지막 생각된 것 있다면
그것은 삶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정리된 삶이란 개념은
그렇게 감동적이거나 화려한 미사여구를 수반하지 못했다.
정말로 이상하게도 나에게 남겨진 삶에 대한 정리와 단상은
거창한 인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었다.
“삶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다”
“삶이란 별게 아니다”
내가 병원 문을 나서면서,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오르면서,
그리고 이렇게 글로 정리하면서
다시 또다시 나에게 되 내이는 말은 이런 것이다.
단지 이 말이 해철형의 입원과는 별로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동안 이 말은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삶이란 별게 아니다 !
<형묵이형 카메라에 있는 사진... 잔을 우측으로 돌렸다고 한참 웃었다... 전향했냐고...^^>
나는 타이밍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물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과 적시를 맞추는 것은 별개이고
대부분은 늦다... 게으르다는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 배례를 선후배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
재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이제 86세의 아버님만 쓸쓸히 어머니를 바라보신다...
형과 조부의 사이를 어머님이 먼저 채우셨다...
또 다른 죽음, 이별... 헤어짐...
<어머니 묘소... 빨간 장미꽃다발... 아버님이 준비하셨는지...>
어머님 묘소에서 아버님이 한마디 하셨단다...
<겸아, 거기서 네 에미 만났지?
저 붉은 장미꽃 다발 보이냐?
네 에미에게 말해다오
사랑한다고... >
<1997 01 21>
... ...
모두가 잠들고 지쳐있던 새벽녘...
이제 곧 영안실을 벗어날 해철형의 영정 앞에
아버님과 어머님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기대하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이제 두 손 꼭 모으시고 두 눈 꼭 감고서 무릎 꿇고서 단정히 앉아서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셨다.
... ...
나란히 해철형 영정 앞에 앉아 계신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리고 이제
해철형이 누울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아버님이 두 손을 꼭 쥐고서 꼭 쥐고서 그렇게 계신다.
망부석처럼, 돌부처처럼 그냥 그렇게 두 손을 꼭 쥐고서 서 계신다.
아버님은 무엇을 생각하실까?
무슨 생각을 하실까?
... ...
안타까움? 이미 예정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죽음이란 이런 것인가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여전히 그 깊은 맛을 모른다.
단지 내게 다가오는 어두운 감정이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건 아쉬움이었고,
불안함이기도 했다.
그 아쉬움과 불안함은 한동안 나를 잠 못들 게 만들었다.
... ...
눈은 쏟아지고,
해철형과 너무나 꼭 같은 아버지의 간절한 묵념과
끝내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의 손에서 흙이 뿌려지며
그렇게 갔다.
너무 먼 곳으로.
<이곳 풍습이 관을 같이 묻지 않는다... 차가운 눈발에 더 차갑게 느껴졌던...>
내려 가면서의 아버님 말씀
“ 참 허무하지요 ”
자식의 죽음에 한 방울 눈물 없이
덤덤하게 말라가는 아버님의 간절함도
“ 글세, 그놈이 낙골 들어가서 라면만 먹더니,
거∼ 또 어느 날인가는 몸이 아파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가더니
학교에서 데모한다고 또 돌 들고 나갔다지 뭐요,
거∼ 빈민운동인가 뭔가 하면서 전경들하고 각목 들고 싸우기도 하고 말이요... ”
당신이 들으셨던 많은 말들 중 유독 못 먹고, 못 자고,
고생한 이야기들만 기억되시는 모양이다.
빈자리, 형의 빈자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도,
고생한 이야기도,
고상하고 웅대한 뜻으로 만으로도 남아 있지 못했다.
형이 형의 아버님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한 마디 뿐이었다.
“ 이렇게 보내니 너무 허무하지요?! ”
그냥 그렇게 보내기에는 너무나 허전했다.
... ...
내려오는 길...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남기는지 혹은 버리는지 아무 말이 없다...
단지 20년만에 만난 사람들도 있고
1년만에 온 사람들도 있고
그 빈 시간의 여백들을 채우기 여념이 없다...
웃음...
약속...
그리고 헤어짐...
이별이 만들어준 과거의 회상이
지금의 연줄이 되고, 관계가 되고, 연결이 된다...
죽음이 만들어준 지난 세월의 여한들이
가슴에 남고, 마음에 남고, 빈 공간을 채워준다...
버림과 비움의 여백에
새싹들은 돋아날지...
온전히 그 몫은 나의 것이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형이 작사 작곡한 노래... 민중의 아버지...>
여전히 나는 그 질긴 끈을 놓치 않았다...
여전히 나는 그것이 삶이라 믿으며
여전히 희망이라 생각하며, 꿈이라 생각한다.
형을 위해?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모두를 위해...
<2003 01 25>
선배의 역할이 다양했을까요?
전도사로 빈민지역에서 활동했으니 철거민, 일용노동자들이 당연히 있을 거고
노점상도 했으니 노점상 형님, 누님들도 있고
작사 작곡에 재주도 있었으니 가수도 있고
연극배우와 연출도 겸했으니 방송국관계자도 있고
정치적 활동도 했으니 NGO 관계자, 국회의원이나 현인수위 관계자들도 있고
종교 활동도 여기저기 폭이 넓었으니 목사님, 신부님도 있고
뿔뿔이 흩어져 서로 먹고 살아가니 회사원, 백수, 주부, 선생님, 교수도 있고...
이번엔 부부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도착하기 전 기도드리는...>
아버님 어머님이 한마디 하십니다.
형의 묘와 할아버님의 묘 사이의 빈공간이 우리가 들어갈 곳이야.
이젠 거기 잡목들도 베어내고 터도 닦아 놓아야지...
그리고 이젠 추모식을 그만하자...
6년이 넘었으니 10년, 15년으로 끊어서 하면 좋지 않을까...
오늘같이 좋은 날도 있지만 눈발 날리던 몇 번의 기억이
너무 걱정스러웠나 봅니다.
동의도 없고 반론도 없습니다.
아버님 어머님과 10년, 15년 후... 왠지 아득합니다.
해마다 오는 이도 많지만 10년만에 15년만에 처음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형이 있어 만남이 있었듯, 또 그렇게 만나길 우리들은 기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속에 있는 형과의 만남은 혼자의 것이지만
볼 수 있는 더 많은 사람들과의 조우는
최소한 나눔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이들의 만남이 항상 과거의 회상만을 강요하는 건 아닐 겁니다.
꿈꾸는 이들이 만남에서 잃지 않아야할 좌표를 되새김하는 것일까요?
잠깐 잠깐의 몇 마디에 짧게는 수개월에서 멀리는 10여년의 공백을 채워갑니다.
언제나 그렇듯 여전히 빈 공간을 찾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내려가는 길... 아버님의 다리가 편해보이지는 않습니다
부축 받는 게 꽤 싫으신 아버지...
놔, 이래봬도 내가 과거엔 스키선수였어...
내려 가는데는 도사야 내가...
자꾸 삐끗거리는 돌부리에 마음이 자꾸 아립니다.
이젠 우리도 내려가야죠...
<늘 빈손으로 간다... 형과 지금 나눌 수 있는 건 담배밖에 없나보다... 동기가 찍은...>
저는...
수없이 많은 시간과
수많았을 경험과 기억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들...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정리하는지 생각 없이 던집니다.
저에게는 썩 어울리지 않게 듣지 않고 말을 합니다.
침묵이 싫었을까요?
후배의 어리광일까요...
아님 이런 상황에 대한 변명일까요?
<아버님이 쓰신 비문... 불문과 교수님답게 프랑스 혁명과 라마르세이에스가...>
낙골에 처음 발을 디뎌본 게 85년?
그때의 제 생각을 다시 한 번 추스립니다.
잊지 않고 있는가... 담고 있는가... 충분히 준비하는가...
그리고 그만큼의 열정으로 지금을 살아가는가...
불현듯, 문득 홀로 만나기 어려운 자리를
많은 지우들과 함께 함이 편안할까요?
빈 공간을 찾아가는 습관에 외로움을 찾아가는 의도는 묻혀버렸습니다.
어쩌면 외로움엔 충분히 단련되고 훈련되고 즐겼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더 깊고 진한 외로움을 갖고 싶다는 생각만 듭니다.
<내려 오기전... 형묵이형 사진...>
이제 헤어질 시간...
뿔뿔히 흩어지는 차량의 소음들...
오늘은 왠지 바다가 생각나지 않는다...
14km만 더 가면 금강하구언인데...
괜한 핑계를 대며 보령 성주사지로 차를 돌렸다...
석탑 4기와 부도, 입불이 남아있는 곳...
890년 만들어진 부도와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모든 게 사라지고 남아있는 몇 기의 석물들이 그 이름을 대신한다...
폐사지를 거닐며 또 다른 상념...
국보에 보물로 꽉 채워진 성주사지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나는 지금의 모습으로 성주사지를 기억할 것이다.
그 모습이 890년 당시의 모습이 아니고
한때 2000명의 승려를 거느리던 영화의 흔적도 아니고
사명대사의 승병들이 모이던 곳도 더더욱 그려지지 않는다...
텅 빈 공간만이 석양빛에 지워진다...
충분히 버리는가... 충분히 준비하는가... 열심히 살고 있는가...
이리도 허전하고 공허하다면 해철이형과 약속이라도 할껄...
새끼손가락 꼭 묶어서 약속이라도 하나 해둘 걸...
두고 두고 가슴에 담아둘 약속이라도 남겨둘 걸...
<텅빈 폐사지... 남아있는 그 무엇으로 역사를 메꾸고 문화를 논하고, 삶을 기억한다...>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담고 있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을
애매한 석양을 탓하며
하늘을 탓하며 그렇게 걸어 본다...
<1997 01 23>
모든 길에는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그때와 그 시간을 내 맘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
그 목적지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만,
아무도 서로의 사연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한곳에 머무를 것이다.
인생도 그런 것일까?!
... ...
우리는 많은 사람을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들의 전부를 알 수 없다.
단지, 자신과의 한때를 추억하고
그 사람의 전부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타인에게 강요하는지도 모른다.
어려움을 함께 한 사람은 어두움을 기억하고
기쁨을 함께 나눈 사람은 밝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그 양면을 모두 나누었다고 우리는 전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때의 시련이 영원하지 않고
한때의 영광이 지속되는가의 문제는
어쩌면 우리 기억의 범위를 벗어나는지도 모른다.
한 때의 기억으로 전부를 말하지 말고
한 때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하지 말자...
살아있는 끊어지지 않는 긴긴 모습을 온전히...
온전하게 기억하고 온전하게 남기고 싶다...
<사진을 찍었던 이날도 최류탄이 터졌고 형과 한참 웃었다... 나는 기억이 없지만 이한열군과 함께...>
해철형이 무엇으로 남아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해철형이 무엇을 내게 남겼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잠시의 머뭄과 기억의 흔적들을 되새기며 잠시 생각하는 거...
내게 남아있지 않는 빈 공간...
빈 시간을 그렇게 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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