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18-6. 인도 불교의 쇠퇴...
18-6
○ 그리고 이슬람과 대립과정에서 살아남은 힌두교와 자이나교에 대비해 불교가 빨리 종말을 맞이한 이유고, 인도불교의 쇠락과 함께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
① 성적인 문제,
<312, 인도의 힌두교 사원의 미투나상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은 많다. 힌두교 사원의 성소(자궁의 방, garbhagriha)에 안치된 것이 ‘요니와 링가’이기도 하고...
아리안의 베다쪽이 아닌 인더스문명의 하라파문화의 요가에서 확인되는 ‘탄트라’란 개념은 존재(남성)와 변화(여성)가 절대자 속에서 이원성의 합일을 통해, 마음을 해방(반야般若, 여성성, 능동적)시켜 연민의 정(대비大悲, 남성성, 수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완전한 지식’ 혹은 자신과 타인이 융합(일여一如) 혹은 무이(無二)의 열락(悅樂) 상태? 결과?로 설명할 수 있으려나?
그래서 대부분 섹스(성교, 양성의 결합의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밀교와 힌두교에서 수행의 한 방편이 됐고, 그 시기는 대략 8세기 이후로 본다...
❶ 카주라호 서부 힌두교 사원/10~11세기 찬델라왕조, ❷ 코나라크 수르야 사원/13세기>
② 무소유를 주장하면서 유력자에게 공양을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하다는 이율배반적 구조와 대승불교와 함께 고도화된 논리체계가 오히려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계기가 됨,
③ 불교(무신론/비인격신론), 힌두교(일원론적 다신교), 자이나교, 시크교(유일신론) 등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만 차이를 둘 뿐, 인도계통의 종교는 우주법칙/다르마에 따른 윤회와 살아있을 때의 업/카르마가 중요하다고 믿는 공통점에서 출발,
④ 브라만교의 제사를 거부하면서 확산될 수 있었던 불교였지만, 힌두교에 비해 일상 가족들의 제사의 식(式)이 없는 불교는 일반 대중에게서 오히려 멀어졌다는 지적 등이 있다.
⑤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체의 위기에서 힌두교나 이슬람교에 비해 불교와 자이나교의 역할이 작았다는 게 큰 이유가 됐을 거라 생각된다.
즉 굽타제국 멸망 이후 지속된 소왕조시대의 분열과 대립, 이슬람의 진출에 인도인들이 대항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지속 또는 확장과 방어가 필요할 때 즉 위기에 대항해야 하는 결속력이 필요할 때 힌두교 지도자들과 교도들이 중심역할을 한데 반해,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들의 역할은 작았거나 조직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313, 소왕조 시대 힌두교 사원건축과 불교 석굴사원건축 발전...
소왕조시대란 말은 통일제국의 맛을 본 이들간의 분열과 대립이 치열했다는 의미고, 이때 중요한 것은 개인의 안위와 가족의 평화였을 것이다. 힌두교를 믿는 각국의 왕들은 저마다 이 전쟁과정에서의 승리를 위해 신전을 짓고 안녕을 기원했으며, 피지배계급은 석가모니와 부처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구심점이 된 신들에 열광했을 것이다.
자연 이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비와 광명을 내세운 석가모니가 아니라 전쟁과 파괴의 신 – 즉 힌두교의 시바신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보여준 불교의 통합적 교리의 설파나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이 보인 희생과 중심적 역할과 대비된다.
때문에 인도의 소왕조시대, 이슬람의 침략, 기독교의 진출과 함께 시작된 식민지화 과정 등 중근세 이후 인도역사에서 힌두교를 믿는 왕족은 그들이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만큼의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
역으로 13세기, 불교도의 치열한 저항의 결과 힌두교나 자이나교에 비해 불교의 멸망(!!!)이 선언될 정도로 더욱 철저히 파괴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⑥ 한편 유일신을 앞세우면서 절대왕정을 추구한 이슬람교나 기독교의 배타적인 통치시대, “자비와 무지를 깨뜨려 얻는 광명”을 추구하는 불교에 비해 “전쟁과 파괴의 신”이라 불리는 시바신을 앞세운 힌두교가 인도인들에게 더 큰 위안을 준 것은, 종교와 문화의 융합과정에서 서양과 동양, 그리고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양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다.
<314, 사후세계와 내세관...
도교와 유교의 저변에 불교를 받아들인 동양(중국/한반도/일본/베트남 등 동북아)의 내세에 대한 믿음이 11~30% 전후,
카톨릭 중심의 서양이 40% 전후, 신대륙의 개신교와 카톨릭가 60~70% 전후인데 반해,
동남아이슬람이 70~80%, 중동이슬람문화권이 90%, 인도가 99% 가깝다는 통계가 보여주듯,
서양/동양/남양 문화권이 갖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관념은 지구인과 화성인만큼 차이가 있다-상호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간극이 있다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통일된 중앙집권국가를 탄생/유지 시키지 못하고, 결국 외세에 의해 절대왕정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인도인들에게 끝나지 않는 전쟁과 파괴는 비참하지만 일상적인 현실이었고, 윤회에 대한 3종교의 공감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자이나교의 수행보다는 힌두교적 관념이 인도인들에게는 더 큰 위로와 포용이 됐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315, 시바와 비슈누... 힌도교에도 종파가 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파가 비슈누파와 시바파...
잘사는 북부와 브라만/쿠샤트리아 계급은 대부분 비슈누파고, 가난한 남부와 수드라/찬달라(불가촉천민)는 시바파가 많다고...^^
얼른 보면 모르지만, 명확한 차이가 있다. 시바는 눈이 세 개, 삼지창/북/불을 들고, 춤추거나 요가(파란색 몸이면 시바다)하는 모습과 소(난디)를 타고 다니면 시바다.
비슈누는 원반/곤봉/소라고동을 들고 있거나, 아난타라는 뱀 위에 누워있거나, 독수리(가루다)를 타고다니며, 멧돼지(바라하)라는 아바타가 조각된다.
두 신 모두 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이 많은데, 비슈누 부인은 락슈미고, 무릎에 부인 파르바티를 앉힌 경우는 무조건 시바다...
비슈누파가 훨씬 많다고 하지만, 갠지스강을 흐르게 만들고, 링가(요니와 함께)라는 성기가 있는 신전, 그리고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하는 이유는 시바 때문...
❶ 시바와 파르바티와 난디, ❷ 춤추는 시바/라타라자/뉴욕 아시아사회미술관,
❸ 시바와 비슈누,
❹ 비슈누/파리 기메박물관, ❺ 비슈누 아난타샤인/데오가르 비슈누 사원/500년>
⑦ 이런 요인들이 합쳐지면서 결국 인도의 불교는 힌두교와 자이나교로 흡수되며, 시간을 걸렸지만 큰 무리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역사와 배경, 공유하는 가치관이 비슷했기 때문일 게다.
사실 대승불교의 분파이지만, 말법(말세)시대의 개인 기복을 중시한 밀교는 일상생활에서 힌두교와 별 차이가 없다. 또 힌두교는 세계관/우주관일뿐, 교단이 없으니 율종도 없이 개개인이 상황에 따라서 찾는 신을 믿는 만큼 불교에 비해 구속력이 없다.
여기에 대승불교를 통해 정립된 부처의 권속들은 대부분이 힌두교의 신들이고, 또 불교의 석가모니는 브라흐마/시바와 함께 3대신인 비슈누(태양신)의 10 화신 중 하나다. 당초 힌두교에서 파생했고 원리가 같은 만큼, 불교/무신론이 약화 되는 순간 언제든지 밀교화되고 힌두교화 될 수 있는 태생적 조건이 완벽하다.
<316, 베다시대 브라만교의 가장 신성한 왕이자 신들의 제왕인 인드라가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이고,
다시 기원전 500년경에 재정립한 프라나시대 힌두교에서 우주 최고의 원리이자 창조자인 브라흐마(Brahma, 이 이름에서 브라만교/Brahmanism 유례)가 불교의 범천/梵天이 된다...
❶ 인드라와 브라흐마,
❷ 중국에서 제석천은 석가제바/천주제석/천제/천황/인다라, 범천은 석제환인으로 불렸다.
❸ 제석천과 범천/석굴암...
참고로 시바는 대자재천이며, 가네샤는 대환희자재천이고, 브라흐마의 배우자가 일본사찰에 많이 있는 변재천이다. 그리고 제석천은 조로아스터교의 무신이고, 고대 튀르키예-히타이트의 뇌신이다...>
- 제국은 분열됐고, 상좌부불교는 남인도로 넘어가고, 북인도와 서인도, 동인도에 남은 인도인들은 부처와 그 권속들을 숭배했다. 여기에 출가수행도 필요 없이 업(業)만 쌓으면 된다.
신도가 출가/재가수행자를 건너뛰고 신을 믿는 순간, 불교는 힌두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어진다. 그렇게 힌두교의 사원들은 규모를 키워 갔다.
<317, 굽타제국과 힌두교 서사시 편찬>
- 문제는 힌두교 사원들은 율종이 없는 만큼 승원이 필요 없다. 즉 신의 공간 = 신전만 있으면 된다.
비하라굴이 있어야 하는 불교석굴과 승원이 있어야 하는 불교사원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또 비하라굴과 승원을 개조해 신전으로 만들면 힌두교사원으로 탈바꿈된다.
어쩌면 인도에서는, 불교가 힌두교를 배려해 공존했던 것이 아니라, 힌두교가 잠시 불교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키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318, 남인도와 촐라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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