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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Ⅲ. 부록 ▣ 배례석 19-1. 인도 사원과 불전의 탄생 6 - 인도 석굴사원 스투파의 변화

 

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몇가지 메모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19-1. 인도 사원과 불전의 탄생 6

   ; 인도 석굴사원 스투파의 변화와 무불상 시대의 종언

 

 

 

   ❍ 석굴로 들어온 소형 스투파는 인도의 종교건축뿐만 아니라 불탑의 역사에도 많은 변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도불교의 출발이 사리신앙이고, 이 염원이 불탑신앙으로 이어져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 역시 아소카왕의 사리분골과 전파로 인한 확산의 영향이겠지만, 불교와 부처의 상징인 스투파가 그 거대한 규모를 포기하고 실내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숭배와 포교에서 기념비적이며 권위적 스케일이 아니어도 지지받을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이 충분한 토양을 갖췄다는 반증일 것이기 때문이다.

 

<319,인도 불교의 시작과 끝은 사리신앙이며, 그 상징은 스투파다...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피프라와 사리함/뉴델리 박물관, 산치대탑 서문 맨 위쪽 평방의 부조/사리를 운반하는 모습, 람바르 스투파/석가모니 다비 후 사리수습 스투파>

 

 

 

 

   - 그리고 불교와 부처의 상징에 대해 늘어나는 수요(아소카왕에게 필요한 개수가 무려 84천개!!!)를 감당하기에 진신사리의 양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상징적인 무엇인가가 절실히 필요했고, 스투파라는 형상이 이를 대체해도 만족할 수 있다는 시대적 요청이 컸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이 시대는 아소카왕의 의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원전 383년 2차결집을 계기로 대중부가 이탈(근본분열)하면서 이미 18~20개의 부파를 형성한 부파불교시대가 열렸고, 기원전 244년 3차결집 이후 율경논의 삼장을 결집 – 이를 문자로 기록한 불경이 탄생했으며, 석굴사원이 본격적으로 개축되는 등 인도불교 종교적 체계와 내용을 갖추며 한층 정교하게 변하는 과정이었다는 배경이 함께 한다.

 

<320, 아소카왕을 최초의 인도 통합군주, 칙령을 제정하여 인도 전역에 84천기의 불탑 함께 기둥과 바위에 새겨 전파한... 그것만으로 그의 위업을 칭송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아소카왕은 종교와 윤리를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켜 지방-지역 종교인 불교를 세계적 종교로 만들었다. 어쩌면 그로인해 인류는 종교라는 새로운 영역을 정립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소카왕은 인도전역을 비롯해 그리스, 로마, 이집트, 튀르키예 등에 포교사/전도승/법대관을 파견했는데, 이들이 그리스 출신 포교사들이었다고...>

 

 

<321, 아소카의 칙령’/위키백과/바위 담마칙령 제13호가 전하는 아소카 재위 당시 담마로써 정복한 지역들... 이 설명에서 정복전파또는 긍정적이며 우호적 영향력으로 바꾸면 큰 왜곡은 없을 듯...

아무튼 아소카왕대에 파견돼 활동한 이들이 각지에 만든 수도원(?)은 기원후 1세기경까지 이어졌으며, 이로인해 초기 기독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가 많다(물론 대부분 영국, 미국 학자들이지만)

이들 연구는 ; 대략 1900년 전후까지는 불교와 예수행적 및 초기 기독교의 유사성이 크다는 점에, 6차결집이 있던 1955년 이후로는 기독교가 불교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점에 주목하는 거 같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스투파의 규모와 형상, 이와 관련된 장엄조식이 점차 다양해진다. 또 석굴사원의 확산까지 겹치면서 부족해진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대체할 법신사리(法身舍利)가 등장(석재나 벽돌을 쌓아 올린 스투파와 다르게, 바위를 위에서부터 깎아 만든 석굴사원의 소형스투파는 사리를 내부에 봉안할 방법이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컸을 것이다)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적합한 스투파를 조성해야 한다는 경험이 쌓이게 됐다고 생각한다.

 

<322, 스투파를 조성하는 방식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거 같다. 조성 시점을 무시하고 생각하면, 가장 일반적인 양식으로

인더스문명 시절부터 전승된 벽돌형 또는 조적형 산치 불교사원유적,

바위를 깎아 통돌로 조성한 석굴사원형 칸헤리 석굴사원 제15굴 스투파,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은 적석형 군투팔리 석굴사원,

그리고 벽돌과 석재를 혼용하여 건축적으로 조성한 혼합건축형 사르나트 다메크 스투파 타입 등으로...>

 

 

 

 

   ❍ 먼저 스투파의 다양화는 직접적으로 인도 불교사원의 공간배치에 변화를 촉진했다. 또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봉안된 스투파를 제외하고 유명 수행자들의 사리가 담긴 스투파와 봉헌자들의 스투파의 누적도 변화의 직접적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풍장(風葬) 또는 조장(鳥葬) 이후 유골을 항아리단지에 봉안했던 인더스문명의 장례풍습은, 유목문명이며 불을 잘 다뤘던 아리아인이 들어오면서 브라만이 주도하는 화장(火葬) 후 수습된 유골-사리를 스투파 등에 매장하는 풍습으로 바뀌었고, 이는 석가모니의 다비식을 비롯해 불교에 귀의한 스님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323, 석가모니 진신사리 사진에서도 확인되듯이 당시의 사리는 뼈조각과 이빨 등이 그대로 수습된 경우가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 화장장의 소각로 온도가 대략 1,000도 수준인데, 당시 야외에서 거행된 화장을 위해 사용한 장작과 기름이 그만한 온도까지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이 유골들을 수습한 항아리는 현대의 사리기보다 훨씬 컸을 수밖에 없다.

인더스문명 항아리들/모헨조다로 출토, 화장용 항아리/간다라 출토, 사리 항아리/마디아프라데시 소나리 출토/기원전 1세기/영국 빅토리아 엘버트 박물관/여기에서 수습된 유골은 기원전 3세기 인물이었다고...>

 

 

 

 

   - 시간이 흘러 아소카왕이 죽은 100년쯤 지난 시점... 기원전 100년경이면, 석가모니 사후 400년이, 3차결집과 대승불교가 태동하면서 석굴사원이 자리잡은지 100여년이 지난 시점이다.

 

   업을 쌓아 격을 높여 줄 소형스투파들이 봉헌자의 이름으로, 또 유명 수행자들의 이름으로 누적된 그들의 스투파가 불교사원과 석굴사원에 일정 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했을 거 같다. 석굴사원과 불교사원에 소형스투파가 확산될만큼 공급이 늘어났을 거 같다.

 

<324, 평지와 석굴사원의 소형스투파들...

인류역사 속에서 최초로 종교적 공간을 만들어간 불교입장에서 처음부터 종교적 세계관과 상징을 체계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초기 불교사원들은 기존의 전통과 유산을 훼손할 수 없어 확장되는 과정이 더더욱 무질서하고 비정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산치 제3탑과 주변 스투파들, 사르나트 불교유적 녹야원 스투파들, 건투팔리 석굴사원 주변 스투파들, 바자석굴사원 스투파들...>

 

 

 

 

   - 문제는 늘어나는 스투파들 속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스투파와 그렇지 않은 스투파, 또 봉헌의 규모에 따른 차이, 여기에 고승들의 위계 등 이들의 규모와 위치를 어떻게 공간적으로 배치할 것인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25, 산치 불교유적 배치도...

산치유적을 보면, 1,2,3탑을 비롯해 다양한 소형스투파들이 있지만, 크기와 위계가 체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하라구조와 사원들의 분포 역시 마찬가지...

배치를 뜯어보면 산치1탑과 목욕지, 그리고 서쪽의 비하라 구조가 동향으로 맨처음 배치가 되고, 이후 차츰 확장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차이티야 구조는 물론 승원이라 할 수 있는 비하라와 사원 등등은 차츰 부가된 것이고... 때문에 이곳은 비교적 초기의 배치형태라 생각된다...>

 

 

 

 

   석굴사원에서는 메인 스투파는 대형 차이티야에 안치하고, 그 외 스투파는 소규모 차이티야 또는 비하라굴에 안치하고, 그 외는 사원의 한쪽에 집단적으로 모아 둘 수밖에 없었을 거 같다. 그리고 석굴사원을 벗어나 평지사원에서는 메인 스투파를 증축한 다음 그 주위에 소형스투파를 배치하거나, 주탑원과 소탑원의 영역을 구획하여 소탑원에 모아 놓은 방식으로 구획했던 거 같다.

 

<302 도판을 다시 첨부한다...>

 

 

 

 

   ❍ 이와함께 스투파에 대한 장엄조식도 변하게 된다.

   마우리아제국이 몰락하고, 서부에는 사타바하나 제국이, (내가 분류한 기준으로) 북부2에는 숭가제국이,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북부1에 쿠샨제국이 들어섰을 때쯤인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100년 시점이면,

   평지사원의 스투파는 2~3차례 증축으로 규모가 확대되면서 탑돌이 길이 조성되고, 난간(베디카)과 탑문(토라나)이 목재에서 석재로 바뀐 시점으로, 더 이상 스투파의 장엄은 규모와 공간적 확대만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까?

 

<326, 마우리아제국을 거치면서 이후 왕조들에 의해 스투파의 규모는 점점 커지거나 높아진다...

대표적으로 슝가시대에 베디카, 사타바하나시대 토라나가 부가되면서 전형화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양식은 아리아인들의 취락구조에서 차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리안들의 취락과 대문, 바르후트 스투파 베디카와 토라나, 산치 제1...>

 

 

 

 

   - 이에 대한 해법으로 등장한 것이 두갈래의 흐름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나, 진신사리가 봉안된 스투파가 아니지만 – 석굴사원의 중심적 차이타야 등에 봉안할 스투파는 법신사리가 봉안되었음을 증명하는 명문에 덧붙이고 문양과 다양한 장식까지 장엄하여 조성했을 거 같다.

 

<327, 석굴사원 스투파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 명문이 새겨지고, 추후 불상이 조식되는 등으로 변화한다... ❶❷ 칸헤리 석굴사원 소형 스투파, 아잔타 석굴사원 제19굴 차이티야 스투파>

 

 

 

 

   그리고 평지사원에서는 드럼으로 불리는 기단과 스투파 주위에 별도의 장엄조식을 위한 부가작업이 시작되는데, 드럼 주위에 석재판을 붙여 문양을 조식하거나, 주변에 감실(龕室)과 벽감(壁龕) 등을 새롭게 조성한 것이 아닐까 싶다.

 

<328, 평지사원 스투파의 변화... 스투파의 변화를 보려면, 원형에 북부1쪽과 서부, 그리고 남부지방의 양식적 차이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이샬리 스투파, 산치 제3,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사르나트 녹야원 다메크 스투파>

 

 

 

 

   - 이때 석굴사원 차이티야에 봉안된 중형스투파의 기단과 평지사원 대형스투파 주위의 감실 형태는, 인도주거에서 전통적으로 확인되는 첨두형 아치와 차이티야 단면모습인 아치형상, 그리고 수행자들이 머물던 쿠티와 비슷한 크기와 형상, 또는 그리스로마식 신전건축에서 보이는 기둥과 박공(삼각형 패디먼트)을 둔 벽감이 조성/조식 된다.

 

<329, 벽감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기둥과 기둥사이 공간활용과 목적물을 위한 면분할 방식...

목적도 의도도 다르며, 여기에 북부/남부/서중부의 중간지대까지 지방문화의 차이까지 고려하면 양식도 다양하다.

자세한 내용은 추후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북부1 쿠샨제국 영역은 기단부에 건축적 요소가 적극적으로 가미되고, 사타바하나/안드라제국의 영역은 장식적 목적이 강하다는 점만 확인한다.

탁실라 소재 스투파 방형 기단부, 탁실라 소형스투파, 시르갑 도시유적 중 쌍두독수리 문양 스투파 기단부, 나식 석굴사원 제18, 파사드...>

 

 

 

 

   미리 첨언한다면 이 쿠티의 규모와 크기가 부조와 불상의 크기를 결정했다. 왜냐하면 이 쿠티를 모듈로 석굴사원과 평지사원의 감실 및 벽감의 크기가 결정됐기 때문이고, 결국 인도불교의 조각들은 스투파 주위의 난간과 토라나/탑문을 구성한 부재의 크기를 벗어나지 않았고, 쿠티와 감실 및 벽감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했다(그래서 동북아 및 동남아, 중동 등과 비교해보면 인도 불상 크기가 제일 작다. 아니 애초에 인도인들은 대형 불상을 만들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330, 안거시 거주할 목적으로 조성된 쿠티의 크기는 이후 석굴사원의 비하라와 감실을 비롯해 단독사원 및 성소 규모의 기준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행을 위한 수행에서 홀로 생활했던 전통이 독방을 고집했고, 그 습성이 건축과 공간, 그리고 장식의 기준이 된 것이 아닐까...

슈라바스티 제타바나/사위성 기원정사/담마살라/석가모니가 금강경을 설법한 담마살라의 쿠티들...

탁실라 달마라지카 스투파/스투파 주변을 원형으로 쿠티와 감실이 섞여 있다. 내 생각이지만 스투파 확장과정의 초기 형태라 생각된다...

탁실라 자울리안 사원의 쿠티와 감실의 스케일/도심지 인근 평지에 있던 사원의 쿠티가 하부 유구만 남은데 반해, 산악 경사지의 탁실라 자울리안 불교사원의 쿠티는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벽돌벽의 유구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스투파들이 집단적으로 조성된 탑원의 감실에는 불상 또는 부조들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크기는 건강한 청년이 서거나 앉기 어려운 크기다...

나식 석굴사원 제20굴과 아잔타 석굴사원 비하라 내부의 불전/석굴사원에서도 독방의 크기는 불상이 안치될 불전 혹은 벽감 크기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독방을 변경했을 수도 있고, 추가로 더 파내는 공정이 있었겠지만, 그 기준크기는 변하지 않았다...

마하보디 사원 라트나그라하 사당/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넷째주에 일주일 머문 곳으로 이때 오색(파랑, 노랑, 빨강, 흰색, 주황)광명이 보리수를 비췄다하며, 범천과 제석천이 칠보로 집과 칠보좌를 지어 석가모니에게 공양했다는 곳... 딱 이 크기이며, 내부에 작은 좌불상이 있다...

산치 17번 사원/불교사원이냐 힌두교사원이냐는 논란이 있지만, 불교사원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단독 불전이 되며, 멀리 떨어진 프라데시주의 데오가르에 있는 비슈누사원(500)이 힌두교 최초의 단독 사원이 된다. 전랑처럼 구성되는 만다파(바실리카 구조라해도)에 쿠티 규모의 불전(가르바 그리아/성소聖所)이 있다...>

 

<331, 쿠티뿐만 아니라 스투파 기단부 및 난간과 토라나의 규모는 거의 정해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 조식될 부조와 불상의 크기는 한계치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조각이 목적이 아니라 스투파가 목적이며, 더불어 새겨지기 시작한 불상 역시 스투파의 보조재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치 3탑의 토라나 산치 2탑의 베디카... 사진의 사람들의 키를 생각하면 토라나의 스케일과 칸칸이 담긴 조각들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조각의 크기는 주목적물의 규모를 넘지 않았다...>

 

<332. 불교사원의 쿠티와 불교에서 오랜세월 동안 검증-고착된 조각상들의 크기는 타종교 즉 힌두교/자이나교/이슬람시대는 물론 현대까지도 지속된다... 종교적 스케일과 신념보다 인도인들의 문화적 정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잔타 석굴사원 제9굴 파사트/여기에 인용-첨부한 사진들은 스케일을 가늠할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이 있는 사진을 골라봤다...

엘로라 석굴사원/벽감 내부의 신상은 대부분 사람보다 작다...

카주라호 서부사원군 락슈미 사원 벽감/이 벽감의 크기도 마찬가지... 추후 비교 사진을 첨부할 예정이다...

신전예배/라가말라/1610/대영박물관/인도 이슬람의 최전성기인 무굴제국시대 궁궐이 배경이지만, 자세히 보면 링가와 요니 - 힌두교의 신물을 놓고 기도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샤 자한황제는 그 아내 뭄타즈 마할을 위해 그녀가 믿튼 힌두교를 포용했었다...

에캄바레스와라 시바사원 난디상/힌두교 사원의 성소인 가르바그리하 역시 이 크기를 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