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19-2. 인도 사원과 불전의 탄생 6
; 인도 석굴사원 스투파의 변화와 무불상 시대의 종언
❍ 또 장엄조식에서 잊지말아야 할 것은 인도종교에서 불상이 최초의 신상(神像)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느 문화-문명과 마찬가지로 부장품, 장난감용으로 만들어진 신상(身像)은 인더스문명 때부터 있었고, 기원전 3~2세기 산치대탑에는 약사/약시상이 이미 수호신상처럼 스투파를 호위하고 있었다.
주신-본존이나 다름없는 석가모니의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수호신상이 먼저 있었다는 점은, 무불상시대가 끝난 것이 무조건 그리스로마 등 지중해문명의 영향만은 아니라는 점 정도만 체크하고, 이는 무불상편에서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고 넘어간다.
<333, 인도에서 수호신과 신상조성은 불상탄생 이전부터 존재했고, 멀리 인더스문명에서부터 시작해 토속적인 민속신들은 불교를 거쳐 힌두교 등까지 이어진다...
처음엔 인간을 대신한 제물로 시작한 상(像)은 신을 의인화한 신상(神像)이 되었기 때문에 불상(佛像)의 탄생도 우연은 아닐 수 있으며, 이들은 후대에 자격과 조건에 대한 스토리를 가지면서 신의 대행자 또는 권속으로 격상하게 된다...
무불상시대의 남성신-약샤와 여성신-약시를 나누어 소개한다...
❶ 봉헌용 삼엽문 인물상/인더스문명/모헨조다로 출토,
❷ 약샤상/마우리아 시대/마투라 파르캄 출토,
❸ 약샤상/기원전 2세기/우타르프리데시 코삼비 출토/인도 알리하바드박물관,
❹ 약샤상/산치대탑 토라나/슝가시대/토라나 아래쪽인 문틀 하부에 수호신처럼 조성되어 있다...
❺ 약샤상/산치 제3탑 토라나/슝가시대/토라나의 기둥 위쪽인 주두 부분에 조성되어 있다...
❻ 약시와 약샤/바르후트 스투파 토라나의 찬드라(달의 신) 약시와 쿠베라(북쪽 방위 신) 약샤/슝가시대/콜카타 인도박물관/이 상들 역시 토라나의 아래쪽인 문틀 하부에 수호신처럼 조성되어 있다...>
<334, 여성 수호신의 전통도 오래되었고, 이름만 다를뿐 문명과 구분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했다.
임신과 출산이 개념화되면서, 생명잉태는 창조로, 종족번영은 다산과 풍요로, 그리고 모성애는 사랑과 지혜의 상징으로, 성(性)은 미(美)로 이어졌고...
인도에서도 여성 수호신은 처음엔 약시로, 차츰 신들의 부인으로, 그리고 후대에는 압사라/천녀/요정 등으로...
❶ 바빌론 이슈타르 여신/수메르 인안나(Inanna) ➝ 이스라엘-유다 아쉐라(Ashirat 또는 Ashirtu의 히브리어 독법, 최고신인 엘El의 배우자로 모든 신들의 모신, 후대 아쉐라와 바알(남성신)을 섬기느냐 파괴하느냐는 여호와 신앙의 기준이 됐다) ➝ 그리스 아프로디테 ➝ 로마 비너스,
❷약시상과 ❸ 바퀴를 향한 경배/기원전 2세기 후반경/마디아프라데시 바르후트/인도박물관,
❹ 빈자리를 향한 경배/2세기~1세기 기원전/마하라슈트라 파우니/뉴델리국립박물관,
❺ 약시상/산치대탑 토라나, 법륜을 향한 경배/기원전 1세기/델랑가나 둘리캇타/인도 아마라바티유적센터박물관>
- 그리고 또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스투파 기단부의 변화와 함께 불교의 신전 – 즉 불전의 필요성과 함께 불전의 기본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스투파의 장엄조식이 불전의 탄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직접적 연구나 언급은 없어 보이지만) 석굴사원 차이티야 조성과정에서 부가되기 시작한 전실-전랑-엔트라스-파사드의 정형화와 스투파 기단부의 건축적 정형화는, ① 진신사리가 봉안된 스투파 주변, ② 아소카왕이 조성한 스투파 주변, 그리고 새로 개발되기 시작한 교역로 거점을 위해 ③ 새롭게 조성할 도심지 주변 평지사원 등을 어떻게 개선하고, 사당/성소/불전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에 강한 영감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335, 먼저 북부1지역은 그리스와 그리스-박트리아제국, 파르티아제국 등 그리스 및 페르시아 문화와 인도문명의 접경지로 문명의 교류가 극심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발호한 쿠샨제국은 자연 크게 3문화의 융합의 결과를 내놓는다. 그것이 탁실라의 사원과 스투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❶ 탁실라 시르갑 쌍두독수리 스투파 기단부와 사원전경/스투파를 중심으로 작은 사원 공간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기단부는 인도의 북부2나 서중부와 달리 사각-방형 기단부며, 그 구조는 그리스로마페르시아의 신전을 모본으로 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기단부 위 스투파는 전통 인도식이었고...
❷ 고대 그리스로마 기둥양식의 세부명칭/서양건축을 읽고 이해하는 기본이 되는 만큼 익숙해지면 좋다...
❸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스투파/탁실라의 랜드마크 같은 스투파다... 하부 드럼과 상부 돔-안다의 아래 부분은 그리스로마 신전의 기둥 구조를 차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❹ 탁실라 봉헌용 스투파 기단부/그리스로마 신전의 기둥 오더를 충실히 차용한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
엔타블리처(코니스/cornice + 프리즈/frieze + 아키트레이브/architrave) + 기둥(주두/capital + 주신/shaft + 주초/base) + 기단부(스타일로베이트/stylobate + 스테레오베이트/stereobate)
/초기 스투파 기단부에 변화가 생긴 때로, 아직 불상이 조식되지 않았다/바로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통해 스투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그리고 그 결과 불상이 스투파의 장식재나 보조재가 아닌 중심이 되는 불전의 탄생으로 귀결된다. 다만 이 과정은 상당히 긴 시간을 통해 진행되었으며, 또 인도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포교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인 메시아의 상징, 그 상징에 대해 인도인들은 여전히 신상 즉 불상보다 사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인 거 같다. 이런 역사문화의 차이는 추후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힌두교 및 자이나교 불전의 차이로 귀결된다고 생각된다.
<336, 인도 불교의 영향으로 인도의 종교는 (불교에서의 실험을 거쳐) 신전형태의 사원을 조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신전 중 본전-비마나의 구조는 성소-가르바그리하(내부 크기는 전통적인 쿠티의 규모를 벗어나지 않는다)와 성소를 시계방향으로 돌 수 있는 탑돌이 길-프라닥시나로 구성된다. 그 앞의 구조는 규모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석굴사원 비하라의 만다파를 차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문제는 본전에 무엇을 안치했는가다. 불교는 불상을, 힌두교는 신상 또는 상징 등을, 자이나교는 마하비라상 또는 지나상을 안치했다...
스투파의 변화는 불상을 태동시켰지만, 불상은 스투파를 넘지 못한 반면, 자이나교는 일관성 있게 신상을, 힌두교는 신상과 상징을 자유스럽게 혼용했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인도인의 정서와 전통을 생각한다면 불상/신상은 사리 및 상징을 뛰어넘지 못했다...
❶ 아잔타 석굴사원 제26굴 스투파, ❷ 마하보디 사원 성소 좌불상, ❸ 시바사원/시바와 파르바티+링가와 요니+난디, ❹ 자이나교 사원 지나/마하비라상>
❍ 이 내용들을 종합하면, 인도의 불교사원의 변화와 불전의 탄생에서 소형 스투파와 법신사리의 등장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통칭 불사리 중 진신사리가 석가모니의 유골(遺骨, 다비 전후 나온 쇄신사리, 머리카락, 손톱, 발톱 등 신골/身骨)로 석가모니의 정신이 깃든 육신(肉身)사리를 지칭한다면, 법신사리는 경문 및 경전과 금은, 상아, 유리, 수정 등 보석류를 지칭한 것으로 석가모니의 순수한 정신과 불교의 가르침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이다.
<337, 마우리아제국 시대 브라흐마 문자로 ‘부처의 유골’이라 적힌 사리호가 피프라와 스투파에서 발굴되었다...
이 스투파는 진신사리가 봉안됐던 근본 8탑 중 하나로보며, 아소카왕이 사리를 꺼내어 (8만4천개로) 나눌 때 보석 등을 함께 넣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❶ 피프라와 스투파/페페 스투파라 불리기도... ❷ 1898년 영국인 페페의 발굴 당시, ❸ 진신사리와 보석류(기원전 240~200년경)가 섞여 있다...>
- 그리고 법신사리가 진신사리를 대체한 소형스투파가 탄생했다는 말은, 상징을 경배하는 것만으로도 사원의 신성을 증명하고 수행자와 신도들이 집결하는데 이의가 없다는 혁명적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또 석가모니의 죽음-열반-해탈과 사리-스투파만이 가장 강력한 종교적 상징이면서 매개였던 불교에서, 실체였던 석가모니(구체성을 가진 색신)와 진리인 법신(영원성)이라는 2원 구조가, 법신과 화신(化身)에 이어 보신(報身, 구체성과 영원성을 가진) - 즉 삼신불이 등장할 수 있는 개연성도 열렸다.
<338, 인도에서 삼신불 신앙은 완성된 것으로 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법신-화신-보신의 개념을 완벽히 형상화한 삼존불상이 없기 때문...
다만, 화신과 보신에 이어 권속들이 등장하면서 석가모니는 석가모니불로 바뀌고, 각종 부조와 조각상, 그리고 스투파 등에서 주존과 협시불/권속의 배치는 도상의 균형과 안정성을 크게 높였다고 생각된다...
어째든 개념을 형상화하는데 한계가 있어선지, 1세기부터 시작해 8세기 이후까지 조성됐으나 삼존상은 거의 없는 편이며, 석굴사원 후기에 들면서부터 다양한 삼신불 구도가 만들어진다...
❶ 삼존부조상/1세기/베를린 인도미술박물관, ❷ 삼존부조상/2~3세기경/사흐리 바흐를 출토/페샤와르 박물관, ❸ 설법을 권유하는 범천과 제석천 또는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및 관음보살, ❹ 엘로라 석굴사원 제10굴 스투파 불상>
- 결국 석가모니의 형상을 구현한 불상 역시 종교의 상징이 되고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 즉 (진신)사리에 대한 신앙이 불탑/스투파에 대한 숭배로, 이제 불상에 대한 경배까지 수용의 범위가 넓어지고, 재가수행자와 신도들의 선택지가 확대됐고... 무불상시대가 끝난다.
스투파의 변화가 사리신앙의 변화를 촉진하고, 상징과 매개체에 대한 유연한 반응의 결과가 불상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메시아이면서 교주나 다름없는 석가모니의 죽음의 결정체-사리에 대한 경배는, 세계적 종교-기독교/이슬람/불교/힌두교 중에서 불교가 유일하다).
<339, 인도불교의 사리기/사리함은 동북아시아와 달리 스투파의 형상을 벗어나지 않은 거 같다...
물론 다음에 소개할 카니시카왕 사리함 같은 경우가 없지 않지만, 전통적 장례방식에 의해 화장후 수습한 유골을 담는 유골함의 기능에 스투파의 형상이 뚜껑 쪽에 생기다가, 점차 스투파의 형상을 그대로 닮아갔다. 물론 사리기와 스투파의 상호작용에 따른 변화가 있었겠지만...
개념화된 불교의 세계관보다, 스투파 자체가 상징하는 의미가 더 컸기 때문이 아닐는지...
❶ 피프라와 스투파 사리기/기원전 3세기, ❷ 탁실라 시르갑출토 사리기, ❸ 마디아프라데시 소나리 출토 사리기 외함과 내함/기원전 1세기/영국 빅토리아 엘버트바물관, ❹ 수정사리기/3~4세기/스리랑카 출토/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 나는 무불상시대가 끝날 수 있었던 것은,
① 사리신앙과 불탑숭배 전통이 강한 인도불교에서 진신사리 공급의 한계,
② 고승 및 기부자들의 소형/봉헌용 스투파의 증가,
③ 평지사원/석굴사원 증개축과정에서 스투파/소형스투파 장엄조식의 활성화 및 다양화,
④ 경전편찬과 함께 재가신도의 증가 및 대승불교 확산,
⑤ 법신사리의 등장과 삼신불신앙 정립,
⑥ 인더스문명 및 브라만교의 신상숭배 전통(약샤와 약시상 등) 답습이 전제됐다고 생각한다.
<340, 불상조성은 소형스투파의 증대와 쿠샨-사타바하나 제국 등의 스투파 증개축 과정과 맞물렸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소형스투파의 기단부를 장엄조식하던 불상은 차츰 석굴사원의 스투파, 그리고 평지사원의 대형 스투파의 기단부를 변화시키고, 결국 굽타시대를 넘어가면 스투파에 불상이 새겨지는 것은 필수요건이 되고, 불상 안치를 위한 불전조성이 시도된다...
❶ 탁실라 소형 스투파들... ❷ 카니시카왕 사리함/125년경/석가모니불과 범천과 제석천, ❸ 엘로라 석굴사원 제10굴 차이티야 스투파, ❹ 로이얀 탕가이 출토 소형 스투파/콜카타 인도박물관>
- 그리고 불상이 탄생한 곳은 ① 북부1의 간다라지방, ② 북부1과 2의 경계인 마투라지방, ③ 서부의 안드라지방이었다. 불상의 특징이 너무 차별적인 이들 양식은 1, 2, 3세기 전후에 독자적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처음 시작된 곳은 쿠샨제국의 정치적 기반 간다라 지방이었다. 간다라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기반으로 이집트그리스문명을 포용한 페르시아문화(당대 파르티아 제국, BC 247~AD224년)과 인도아대륙의 경계에 있으면서, 실크로드를 통해 대중국 중계무역의 요충지로 세계 4대문명이 상업과 전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류가 일어났던 지방이다.
<341, 불상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전부터 제사에 사용한 봉헌용 상,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인형(상), 그리고 장식용 또는 기념용 상들이 있었고, 이는 세계공통이며 인도 역시 인더스문명에서부터 기원전까지 그 유산들이 남아있다...
무불상시대에도 인도불교는 그 전통을 습합했으며, 지역마다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결과 불상 역시 1, 2, 3세기의 시차를 두지만 간다라, 마투라, 안드라 지방의 성상들은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만들어지기 시작, 굽타시대에 통합된다.
이런 불교의 색깔은 힌두교에 그대로 이어지지만, 가장 토속민속적인 안드라지방 색깔을 바탕에 깐듯한 느낌이다...
❶ 마우리아 제국 멸망이후 슝가제국 테라코타/찬드라케투가르 출토/파리 기메박물관, ❷ 쿠샨제국 간다라불상, ❸ 마투라양식의 카니시카왕/2세기, ❹ 약샤상/3세기/안드라프라데시 칼라파렘 출토/아마라바티 유적센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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